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전단지가 지난해 말부터 서울, 부산, 대구, 광주, 군산 등 전국에서 수천 장씩 뿌려지고 있다. 군산, 대구에서 전단지를 배포한 사례는 내가 누구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그 외 지역에 다수 전단지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아래 시민들)’이라는 익명으로 만들어지고 배포되고 있다. 경찰은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을 뒤지는 등 신원파악에 애쓰고, 경범죄부터 명예훼손죄, 주거건조물침입죄까지 들먹이며 사법처리를 위한 묘수를 찾고 있는 눈치다. 신원이 밝혀진 시민의 집과 인쇄소를 압수수색하는 경찰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도 경찰 수뇌부는 「전단지 살포대응요령」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어떻게든 겁을 주고 입을 틀어막으려고 하니, 답답한 일이다.
그런데 만약 ‘시민들’이 집회 현장에서 전단지를 나눠주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무런 뉴스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 때나 있었던 저항의 방식이 새삼 주목을 끌고 있는 이유는 현재 권력의 작동방식이 독재와 다를 바 없음을 빗댄 ‘직접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즉 대통령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정치화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들의 직접행동은 정치적 억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전단지 배포를 통해 몇 년에 한 번씩 ‘조용히 선거만 하라’는 박제화된 정치를 거부했다. ‘전단지의 정치’로 이름 붙이고 싶을 만큼 짜릿함을 주는 신선한 사건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안타까움과 외로움도 느껴진다. ‘시민들’은 한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수천수만 명이 모인 집회를 해도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며 짧지만 선명한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고 싶었다고 토로했다. 민주주의로 만들어진 공간은 역설적으로 역동성이 사라졌다. 정권이 허용한 집회의 테두리 안에서 집회를 하고, 정권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거나 관리되는 우리의 행동이 겹쳐 보인다. 또한 사회운동이 여전히 대중과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저항의 목소리가 집단적인 정치의 요구나 열망으로 조직되지 못한 채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비판의 목소리가 더 다양한 만남과 관계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지점은 사회운동이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은 전단지 배포라는 직접행동을 통해 당신 그리고 세상과 접속을 시도한다. 이제 사회운동이 시민들과 접속을 이어갈 때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로 나누는 과정이 우리 모두의 경험으로 저장된다면, 그 경험 속에서 한발 더 세상을 바꾸는 일이 쉬워질 것이다. '또 다른' 시민들이여, 함께 전단지에 접속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