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관객 1천 만 명을 동원한 한국영화 20여 편중, 단 한편을 제외하고 등장인물 중 누군가는 죽었답니다. 한공주, 명량, 인터스텔라 등 작년에 제가 본 영화를 떠올려보니, 주인공이 죽거나 주인공의 죽음을 암시하며 끝을 맺었지요. 2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제한된 시간 동안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영화감독은 죽음이라는 요소를 영화에 넣고 싶었을 겁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요소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재생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인간에게 죽음은 재현이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죽음의 이러한 요소를 흥행감독들이 모를 리 없겠지요.
영화 속에서 경험하는 죽음은 사실 나와는 연결감이 없는 3인칭의 죽음이 대부분입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부음 소식 같은 느낌입니다. 나와 연결감이 높은 가족이나 친척, 친구의 죽음은 2인칭의 죽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역시 나의 죽음은 아니지만 우리가 가깝게 직면하는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나는 애도하고 비탄에 잠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 사회는 그럴 여유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빨리 잊으라고,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돌아오라고 재촉만 합니다. 애도와 비탄의 자리는 사라지고 ‘보상’만이 남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죽음을 마주할 그리고 직면할 삶의 자리 없이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죽음을 보여주는 각종 통계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청소년, 노인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상위권을 맴돌고, 노동자들은 죽음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삶을 보듬으라고 외치고 있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어버립니다. 세월호 참사 앞에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한국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진상이고 뭐고, 빨리 보상을 마무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라고, 이제는 잊어버리고 새 삶을 살자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애도하고 비탄하는 사람들을 가두고 연행하고 폭력으로 대합니다.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면 결국 삶과 생명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드러납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면, 최근 한국 영화에 소녀들의 죽음이 경향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폭력은 약한 고리를 타고 아래로 흐릅니다. 이 사회 계층, 계급 구조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집단의 죽음으로 어쩌면 이 사회는 유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끔찍하고 잔혹한 이야기는 동화에만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발 딛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가장 많이 희생된 여성 청소녀들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언제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들의 죽음을 이 사회가 애도한 적이 있었을까요?
지난 5월 29일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일을 했습니다. 5월 날씨는 화창했습니다. 경복궁, 창덕궁 인근으로 소풍을 온 청소녀/소년들은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로 향했습니다. 청소녀/소년들은 국화꽃을 영정사진 앞에 놓으며 먼저 간 친구들을 떠올렸습니다. 이들의 눈시울이 눈물로 번져가고 있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아직, 나에게 당신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애도하고 비탄하며 슬퍼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