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 예정된 4.16인권선언 추진단 전체회의는 ‘메르스 사태’로 연기되었다.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에 국민들이 떠안아야 하는 위험과 불안이 줄어들지 않는 때였다. 그만큼 안전하게 살 권리를 함께 선언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는 때이기도 했다. 전염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나 불안에 갇히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충분히 예측하지 못하는 조건에서 일정을 강행하는 데에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체회의를 7월 11일로 연기하는 대신 6월 20일에는 소규모의 풀뿌리토론 워크숍을 진행하기로 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인권’
4.16인권선언을 함께 만들자는 제안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다. ‘인권’이 너무 막막하고 멀고 어렵다는 이야기다. 한국사회에서 ‘인권’의 자리가 어디쯤인지 실감하게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가족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 일을 겪기 전에는 인권이라는 말은 머릿속에 들어있지도 않았다고, 특별법을 제정하라며 정신없이 거리와 광장을 다닐 때도 와 닿지는 않는 말이었다고. 그러나 가족들은 이제 말한다. ‘인권’ 문제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고 말이다. 아이들이 죽어간 순간뿐만 아니라 그 후 부모들이 겪어야 했던 수모와 모욕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하는 후회가 스친다.
어쩌면 세월호 참사를 함께 겪은 많은 시민들에게는 여전히 먼 이야기일 수 있겠다. 참사와 인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막막한 것도 당연하다. ‘인권’이 우리 일상에서 쉽게 잊혀지거나 유예되거나 무시되었던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는 용산참사 유가족이나 밀양의 할매들에게서도 들었던 이야기다. 그렇게 우리는 ‘인권침해’를 통해서만 ‘인권’을 엿보게 된다. 그러나 이대로 어쩔 수 없다고 손 놓을 수는 없다. 누군가 먼저 깨달은 경험을 서로 나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자신 있게, 조금 덜 후회하게 인권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4.16인권선언을 만들어가는 풀뿌리토론은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배우는 자리이기도 하다.
▲결과는 인권선언 홈페이지의 풀뿌리토론 게시판에서 볼 수 있어요. http://416act.net/decl_board내 안에 ‘인권’ 있다
풀뿌리토론의 기본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누구든 말문이 트일 수 있는 프로그램,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되는 프로그램. 풀뿌리토론 워크숍은 이런 기본프로그램을 직접 해보면서 점검하는 취지도 있었다. 그리고 이미 풀뿌리토론을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감각을 익힐 수 있도록 마련한 자리이기도 했다. 40여 명이 모여서 모둠별로 토론을 진행했다.
프로그램은 세 가지 질문을 줄기로 진행된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릴 때 당신의 느낌이나 감정은 어떤 것인가요?” 참여자들은 두려움이나 슬픔, 분노 등 다양한 마음의 결을 자신의 경험과 함께 들려주기 시작한다. 서로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모두가 내 마음 같은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고개를 절로 끄덕이다 보면 우리가 함께 겪은 참사의 시간들이 눈앞에 그려진다. 두 번째 질문은 이런 공통의 경험 속에서 뽑아낼 수 있는 문제는 무엇일지 찾아보는 순서다. “세월호의 침몰로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동안 ‘이건 쫌 아니다’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사람이 이러면 안 되지, 사람한테 이래선 안 되지, 사람 사는 세상인데 너무하다, 이런 느낌들은 어디에선가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감각을 거스르는 경험들이기도 하다. 가끔 너무 추상적이거나 이미 식상하게 느껴지는 문제들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각자 보거나 듣거나 겪었던 순간들을 말하다 보면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모두를 위한 ‘인권’사용설명서
세 번째 질문은 앞서 확인한 문제들을 바꾸기 위해 함께 선언해야 할 권리들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제안하는 시간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약속이 인권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문제들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무엇일까요?” 두 번째 질문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참여자들은 다양한 권리들을 제안한다. 진실을 밝혀달라는 요구를 하는 데에도 유언비어를 신경 써야 했고 제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슬퍼할 권리, 분노할 권리가 필요하다. 인권을 침해당하는 순간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 인권을 배울 권리가 필요하다. 유가족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씁쓸했다, 누군가에게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을 누릴 권리가 있다 …….
그리고 이런 권리들과 연결된 권리들에 대한 이야기가 따라 나오기도 한다. 일하는 사람이 충분히 휴식을 누릴 권리, 정당한 배상이 모욕의 이유가 되지 않을 권리 같은 것들 말이다. 말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확립되어 온 인권의 내용과 만나게 되고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기도 한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보니 각자 제안한 권리들에 대해 토론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조금 갸웃거려지는 내용도 있을 테고, 누군가 제안한 권리의 실현을 위해 다른 권리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래도 이렇게 하나하나 찾아가다 보면 4.16인권선언에 담겨야 할 내용이 펼쳐질 것이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우리 스스로 떠올리고 제안한 권리들이 모이면 다시는 참사를 겪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인권’사용설명서가 되지 않을까? 풀뿌리토론 워크숍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감’을 잡고 전체회의에서 다시 만나자 약속했다. 4.16인권선언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