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친척집에서나 보던 컬러TV가 생긴 건 맏딸인 내가 고3 되던 해의 일이다. 심지어 비디오테이프 녹화가 가능한 일체형이었다. 교육방송을 녹화라도 해서 볼 수 있게 하려는 부모님의 배려였다. 야간자습을 하고 집에 오면 자정이 되던 시절 녹화한 교육방송까지 보는 건 불가능했다. 덕분에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이것저것 빌려볼 수 있게 된 동생들이 신났다. 부모님이 결혼할 때 장만했던 14인치 흑백TV를 바꾸게 한 것, 그게 고3이었다.
수능체계 개편 논란을 보며
지난 8월 31일 정부는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개편을 1년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개정된 교육과정을 밟고 기존 방식의 입시를 치러야 하는 중3이나, 내년에 발표한다는 수능 개편안을 기다려야 하는 중2나 속이 타들어가기는 마찬가지일 듯하다. 3년 후의 대입 방안을 논의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사회는 들썩인다. 정부는 수능 절대평가 전환을 강력하게 추진하다가 반발에 부딪쳐 한 발 물러섰다. 내년까지 종합적인 대학입시 개선안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녹록한 과제는 아니다.
암기 위주의 수업을 지양하고 창의력을 높이는 교육, 무한 경쟁 교육이 아닌 공존과 협력 교육과 같은 말들은 낯설지 않다. 학력고사를 폐지하고 수능을 도입하던 때도 비슷한 말들이 있었다. 20여 년이 흐르면서 수능이 또 다른 암기 과목이 되었다. 수능 이후 사교육 열풍도 거세졌고 부익부빈익빈 현상도 심각해졌다. 사교육 부담을 줄이자며 교육방송과 수능을 연계했더니 이제 교실에서 교육방송 교재를 푸는 실정이다. 공교육을 내실화하겠다는 목표가 사교육 부담을 가중시키고 공교육을 왜곡하는 악순환이 쉽게 끊길 것 같지는 않다.
이번 수능 개편 논란도 여기에 갇혀 있다. 수능을 절대평가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은 공감대를 얻어왔다. 상대평가 방식이 고교 교육과정을 왜곡하는 문제가 지속되어왔기 때문이다. '줄 세우기 상대평가'를 검토할 필요는 분명하다. 그러나 절대평가 전환을 반대하는 주장 역시 억지는 아니다. 반대 논리의 핵심은 절대평가로 전환할 때 '변별력'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수능 변별력이 떨어지면 학생부종합전형의 비중이 커지거나 본고사가 부활할 우려가 있다. 자기소개서 쓰기까지 사교육 시장이 열리는 현실이니, 금수저 논란이나 입학 비리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공정하지 않다거나 평등하지 않다고 느낄 법도 하다.
줄 세우는 사회
대학 자체가 줄 서있는데 학생들은 줄 세우지 않겠다는 희망은 고약할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 학력과 학벌 차별이 심각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난 5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학력이나 학벌 차별이 있다는 응답률은 99%였다. 그런데 차별이 있다는 인식과 차별에 맞서는 행동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다.
'학벌 차별은 나쁘지만' 차별을 없애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서열 높은 대학을 가려는 선택이 개인의 전략이 되기 쉽다. 이렇게 차별을 받아들이는 손쉬운 방식이 '변별력'이다. 특정한 시험 절차나 확인된 점수가 공정함의 징표가 되고, 이제 문제는 차별이 아니라 능력이 된다. 고졸과 대졸, 서울대와 지방대가 어떻게 같냐는 관념이 뿌리 깊은 이유도 그것이다. 최근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 논란도 다르지 않다.
컬러TV를 들여놓은 엄마는 입시 원서를 쓸 때 내게 사범대를 가라고 했다. 적당한 소득, 안정적인 고용관계, 방학이라는 여유 등이 이유였다. 만약 사범대를 갔더라면 나는 어떻게 살게 됐을까 떠올려봤다. 교사 선발 인원이 많지 않으니 임용시험 경쟁률은 늘 높다. 정규 교원으로 임용되기 위해 기약 없는 임용시험에 계속 도전했을까? 기간이 끝나 퇴직하게 되더라도 교사로 살기 위해 기간제를 선택했을까? 임용시험을 준비하는데 기간제 교사가 정규직화된다는 소식이 들리면 억울함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억울함이 '능력 없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되지는 않았을까? 적어도 내게, 교사를 고용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기간제 교사'라는 신분을 만들어낸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까지 할 여유는 생기지 않았을 듯하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환상
대입과 대학 서열과 노동시장으로 이어지는 구조화된 차별은 실재한다. 학력이나 학벌이 당신을 설명하지 않는다며 자존감을 독려하는 수사들은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무력하기만 하다. 줄 세우기 교육을 넘어서자고 하지만 사회는 삶을 줄 세우고 있다. 노동 시장에서 직종이, 대학에서 학벌이 줄 서있으니 어떤 변별력이든 줄 세우는 변별력이 되어버린다.
"투명인간처럼 학교에서 지냈다"는 기간제 교사의 고통을 누가 감히 평등하다 하겠나. 그러나 차별의 구조가 능력의 차이로 정당화되기 시작하면 차별은 개인의 능력에 따른 정의로운 결과가 되어버린다. 온갖 시험들이 절차나 규칙, 난이도나 채점 기준 등에서 늘 불공정 시비에 휩싸인다. 능력의 차이가 제대로 변별되지 않았다는 항의다. 변별된 결과에 대한 책임이 고스란히 개인에게 돌아가니 민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결과의 차이가 너무 크다. 평등에 대한 도전은 불공정 시비에 갇히게 된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남긴 말이다. '반칙과 특권'이 횡행하던 시대를 넘어서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 말이 현실의 무엇을 바꾸려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수능 비중과 변별력이 높아지는 것이 차라리 평등하다는 주장이나, 수능으로 줄 세우는 것이야말로 공정하다는 주장에 어떻게 응답할지 궁금하다.
지독한 불평등의 시대다.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면 결과가 정의롭다는 최면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기회의 평등은 불평등의 늪에서 빠져나올 동아줄이 못 된다. 오히려 부정의를 정당화할 뿐이다. 재산과 소득이 가장 강력한 기회이자 불평등의 기원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다들 부익부 빈익빈이 문제라고들 하지만 누군가의 재산과 소득은 공정한 경쟁에 따른 정의로운 결과라고 승인되고 있지 않은가. 좌표를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결과가 평등할 때만 결과는 정의롭다.
무엇을 변별할 것인가
기회의 평등은 삶의 모든 순간을 결과의 예비 단계로 만드는 주술이기도 하다. 공교육을 내실화하겠다는 의지가 늘 미끄러지는 이유도 그것이다. 삶은 기회와 과정과 결과로 분절되지 않는다. 기회이자 과정이자 결과인 '지금 당장'의 삶이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모두가 평등할 때까지,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겠다는 약속과 확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줄 세우는 사회가 달라지기 전까지 어떤 대학 입시 방안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디에서든 악순환을 끊기 시작해야 선순환의 가능성이 열린다. 수능 절대평가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대학입시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정부의 방향은 적절하다. 그러나 대학 서열화와 취업 준비기관이 되어버린 고등교육 재편 방안도 동시에 준비되어야 한다. 불안정하고 차별적인 노동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노력도 멈춤 없이 전개되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구분은 누군가의 존엄을 침해하는 결과를 정당화하는 힘의 논리였을 뿐이다.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별력이 아니라 평등해지기 위한 변별력을 키워보자. 서로의 존엄함을 깨닫고 발견하며 각자의 삶을 존중하고 독려할 수 있을 때까지 평등에 도전하자. 어떤 차이들이 삶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줄 세우는 근거로 용납되어선 안 된다. 시행착오도 겪겠지만 지금은 세상을 크게 바꿔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