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10~11월 전국을 다니며 간담회를 진행했다. 그 결과로 전북과 대구 등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지역 연대기구도 구성되고 있다. 지역에 인권단체들이 있는 경우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유예되어 온 10여 년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담회에서 만난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제정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이제 갖기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간담회는 흥미진진했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많은 걸 고민하게 되기도 했다.
차별이라고 쓰고 OO이라고 읽다
살면서 ‘차별’이라는 말을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어떤 때에 차별이라는 말을 썼을까? 슬며시 질문을 건네 보면, 부모님이 남동생한테 용돈을 더 많이 줬다거나, 학교에서 선생님이 구박했다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다르게 대우받은 경험에 보통 차별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다. 법적으로 ‘차별’이 쟁점이 될 때의 용례와 미끄러지는 부분이 있다. 구체적 사건들에는 제각각 맥락이 있으므로 다른 대우 자체를 차별이라 하기는 어렵다. 청각장애인이 수능시험을 볼 때 음성안내를 제공하는 것처럼 오히려 평등을 위해 다르게 대우해야 하는 경우들도 있으니 말이다. 결국 다른 대우가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 차별 판단에서 중요하다.
여성이 서비스 업무에 더 적합하다며 여성에게만 특정 업무를 전담시키거나, 고객이 선호한다며 치마 유니폼을 강제한다거나 할 때 이것은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성별 고정관념에 기대는 동시에 강화시키는 차별행위임이 분명하다. 상당히 많은 차별에서 당대의 편견이 핑계가 된다. 목욕탕에 외국인이 들어오는 걸 싫어하는 주민들이 많다며 이주여성의 출입을 거부하거나, 인근 상인들이 반감을 가져 갈등이 생길 수 있다며 성소수자단체에 시설 대관을 거부한다거나 하는 사례들에서도 확인된다. B형간염 바이러스를 보유했다고 기숙사 생활이나 직장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데도, 과학적 지식과 정보를 무시한 채 차별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개인의 구체적 경험을 근거로 대기도 한다. 나이지리아인에 의한 사고가 있었다며 식당에 나이지리아인 출입을 거부했다거나, 최근 논란이 됐던 ‘노키즈존’처럼 아이를 동반한 사람들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누군가 차별 당했다고 느낄 때 상대방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차별’이 대체로 부딪치는 벽이다. 차별은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이며 비의도적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차별을 당하는 입장에서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을 차별을 가하는 쪽에서는 모른다. 그러니 차별이라고 써도 읽는 방식은 제각각. 차별 당한 사람은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한 경험에 붙일 수 있는 자기 해석과 투쟁의 언어를 얻지만 그 말은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여성이라서, 나이가 어려서, 외국인이라서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하면 ‘그게 무슨 차별이냐’에 그치지 않고, 네가 여성이라서 나이가 어려서 외국인이라서 그럴 만하다고 침묵을 강요한다.
능력과 역량 사이
차별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때 더욱 어려워지는 지점은 ‘능력’의 차이를 핑계로 대는 경우들이다. 주로 고용영역에서 발생하는 차별이 이렇다. 대선 출구조사를 하는데 ‘여대생’이 필요할까? 성별이나 학력은 출구조사원으로 일하는 데 꼭 필요한 자격이 아니다. 채용모집공고는 익숙한 차별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다. 물론 여기에도 언제나 핑계는 있다. 경찰공무원은 외근 업무가 많아서 여성이 감당하기 힘들다거나 하는 주장들.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차별 당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해당 직업에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혹은 그 사람이 단지 특정한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해당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운지를 따지지 않은 채 채용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고용 영역에서만 있는 문제는 아니다. 청각장애를 가진 한 사람이 주택임대차계약을 하려는데 집주인이 갑자기 거부하고 부동산을 나가버렸다. 세입자와 소통해야 할 일이 생길 텐데 청각장애인과 어떻게 소통하냐는 것이 집주인의 주장이다. 집의 관리를 위해 청각장애인과 소통할 때 문자를 이용할 수 있다. 집주인에게는 굳이 수고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일 수 있지만 주거권이 기본적 인권이라면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핑계를 댈 때 차별 피해당사자를 걱정하는 말을 덧붙이는 경우도 흔하다. B형간염바이러스가 있으니, 소음성 난청이 있으니 일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될 것을 우려했다나? 정말 걱정이 됐다면 노동환경을 개선하거나 당사자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대책들을 고심했을 것이다.
한부모가족지원법 시행규칙에 대한 차별 진정이 있었다. 아버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이 거주하는 ‘부자복지시설’에만 영양사와 조리원을 두도록 한 규정이 문제였다. 정부는 남성과 여성의 사회화 과정과 그로 인한 남녀 역할 차이를 고려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아버지가 음식을 조리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실제로 많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아버지를, 그와 그 자녀들을 걱정했다면 아버지의 가사노동 능력을 키울 수 있는 훈련을 프로그램으로 배치하는 것이 더 나은 정책일 수 있다. 시설의 불안정한 거주를 지원하려는 측면이라면 어머니와 자녀가 거주하는 시설에도 영양사와 조리원을 두는 것이 옳다. 차별을 정당화하려 애쓰기보다 차별을 알아차리기 시작할 때 사회는 인권을 증진하기 위한 역량을 키울 수 있다.
차별을 알아차리기
개개인의 특성이나 능력을 집단에 대한 편견과 결부시켜 평가절하하는 것은,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존속시키는 방법 중 하나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관련해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동일한 일을 하거나 동일한 가치의 일을 하는데도 입직 경로가 다르므로 차별은 정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입직 경로가 다르다는 것이 능력이 다르다는 근거도 되지 않으며, 능력의 차이가 처우의 차이 모두를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차별이 만연한 현실에서 시험과 그 결과가 차별을 정당화하다 보니 우리가 차별에 길들여져 있을 뿐이다.
차별 판단은 대입만 하면 답이 나오는 산술식이 아니다. 차별이 존속되는 데에는 나름의 핑계들이 있고 그것이 합당하지는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문화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자연스러움’은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당대의 편견과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차별’을 주장하고 평등을 도모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주장이 무리스럽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외면하는 것보다 차별 주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회에 훨씬 득이 된다. 누군가의 차별 경험은 나와 무관하지 않고 아주 작은 변화라도 차별을 알아차리고 시정하는 경험이 쌓이는 만큼 우리의 권리가 더욱 권리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육아휴직 중인 사람을 승진에서 제외하는 운영규정을 누군가 차별이라고 진정했다. 회사는 복직 이후에 승진 기회가 부여되므로 차별이 아니라 주장했지만, 국가인권위는 “상당수의 여성 직원들은 승진과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육아휴직제도의 사용을 기피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육아휴직제도의 취지에 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차별에 해당한다고 결정했다. 이제는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도 어색하지만은 않게 됐다. 육아휴직이 부모와 아동의 권리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차별당했다고 말하며 용기내어 나선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차별금지법과 함께
차별금지법은 확인된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기도 하지만, 차별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법이기도 하다. 근거 없는 편견이나 고정관념들, 개개인의 우연한 경험들이 특정 집단을 구분하여 배제하거나 권리를 제한할 이유가 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차별’을 누군가 사회를 향해 쓰기 시작할 때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는 만큼 사회는 변화한다. 차별금지법은 목소리 내기 어려운 차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사회가 공식적으로 듣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평등을 저해하는 불합리한 주장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누군가 차별 당했다고 주장할 때, 어떤 권리가 비로소 ‘인간의 권리’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