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기자회견장 같지 않지 않았다. 이름은 물론 휴대전화번호까지 남겨야 했고, '서약서'에 서명까지 해야 했다. 탈성매매 여성들이 직접 청한 기자회견장은 들어서는 과정부터 쉽지 않았다. 아직 많은 언론들은 이들을 '윤락녀'나 '사창가 출신'으로 부르는데 너무 익숙해 있었던 터라 기자회견 주최단체 중 하나인 '다시함께센터'의 조진경 대표는 이렇게 까다롭게 굴 수밖에 없는 자신들을 아니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며 ‘신분확인’을 이해해 달라고 재삼 사과했다. 그녀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잔뜩 궁금증에 차 있는 언론사의 카메라도 대동되었다. 그러나 촬영시간은 불과 10분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을 땐 자기 스스로 보호색을 가져야 한다.
드디어 그녀들이 등장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밀짚모자, 얼굴은 마스크로 가렸고 모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카메라 조명은 쉴새없이 터졌다. 그녀들의 머리는 자꾸만 숙여졌고 내 마음도 조금씩 저려왔다.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처럼 살아야했던 그녀들을 내가 감히 공감한다고 할 수 있을까.
정해진 촬영시간이 끝나고 모든 카메라는 퇴장했다. 동시에 그녀들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와 선글라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밀짚모자도 퇴장했다. 말갛게 드러난 그녀들의 얼굴을 마주대하면서 기자회견은 시작되었다.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증언은 믿기 힘들 정도의 충격적인 이야기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하나같이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자신을 희생시켜 성매매의 길로 들어선 이들은 또다시 ‘업주의 이익’에 철저히 자신들을 희생시키고 살아온 삶이었다. 가족을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바닷물로 뛰어든 ‘심청이’는 용궁이 아닌 집창촌에서 날마다 업주의 공양미를 위해 팔려다니는 가련한 신세들이었다. 그녀들은 철저한 피해자였다. ‘충격’ ‘경악’ ‘엽기’라는 말로 포장하는 저작거리의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이들의 입을 통해 ‘고백’되어질 때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인권하루소식 기사로 옮겨진 ‘증언’의 한 부분은 나의 동료 편집인에 의해 ‘검열’당할 정도로 입에 담기 힘든 이야기였다. ‘인간의 존엄’을 바로 세우는 우리의 운동은 인간의 추악함을 목도하기 다반사이며, 그것을 알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인권운동을 하면서 반드시 치러야 할 통과의례인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업주’라는 인간이 ‘성매매 피해여성’이라는 똑같은 인간에게 저지른 야만은 문자 그대로 '인간의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성매매 피해여성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공창제’를 허용하라고 한단다. 이러한 요구가 성매매 피해여성들의 ‘간절한 바람’인지, 업주들이 등 뒤에서 들이대고 있는 칼날이 무서워 거짓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새겨 들어야 한다. 수많은 성매매 피해여성들이 ‘선불금’ 때문에 업주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우칠 때도 되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냉정한 현실 인식에 서툴기 그지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참에 성매매도 하나의 엄연한 노동으로 인정하자고 이들을 ‘성노동자’라 부르기도 한다. ‘공창제’문제를 꺼내자 한 피해여성이 정말 파르르 떨면서 남성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냈다. 돈으로 여성을 살 수 있다는 남성들의 ‘당당한 인식’이 정말 문제라고 남성들의 성매매 합리화에 문제제기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여자를 가질 수 있다는 구조로 인해 수많은 여성들이 성노예, 성기계가 되어 몸을 팔아야 하는 것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그녀의 논리는 입을 통한 언어라기보다 온몸으로 토해내는 전율 같은 것이다. 자신의 몸 위로 스멀거리며 기어다니는 남성의 욕망에 대한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이며, 능멸당한 몸의 절규였다.
‘공창제’나 ‘성노동자’주장을 들을 때마다 내게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라’는 마리 앙뜨와네뜨의 불감한 현실 인식을 대하는 것처럼 어이가 없다. 우리가 성매매 종사 여성들을 피해자라고 규정하는 이유를 정말 모르는 것인지 모르쇠하고 있는 것인지... 인권의 감수성은 아직 소수의 언어이기만 한 것인지 가슴이 답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