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이 집안 사정을 알게 된 건 5월 초쯤이었다. 사랑방 신자유주의와인권팀에서 주거권 기획기사를 계획하고 있을 무렵, 기선이네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집을 비워야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해서 기사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선이가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쉼터를 처음 방문했다. 쉼터는 골목 안에 있는 마당이 예쁜 이층짜리 주택이었는데 불빛이 아늑하고 컴퓨터에 에어컨까지 있었다. 무엇보다 아침, 저녁을 제대로 챙겨먹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기선이는 이미 1년이 넘게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개인 방이 따로 없었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교통비에 용돈까지 준다지 않는가. ‘길에 나앉게 생겼는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하는 생각을 나 역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쉼터 생활을 오래한 아이들을 인터뷰하면서 시설 생활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수용과 통제 위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시설 생활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권리’라는 말이 새삼 다시 떠올랐다. 그들이 왜 집단 속에서 ‘숨막혀’ 하고 ‘참는 게 일’이 되어 ‘예민하고 격해져야’ 하나. 그들에게는 ‘주거를 요구할 권리’가 있고 ‘시설’은 결코 ‘주거권’의 대답이 될 수 없는데 말이다. 또한 놀란 것은 기사를 준비하며 참고한 그 많은 연구자료 중에 시설 생활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담긴 글을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1학기 수행평가로 어떤 글을 읽고 그림을 그려오게 한 적이 있다. 넓은 마당에 여러 동물이 뛰노는 그림이었는데 한 학생의 그림이 눈에 띄었다. 중학생 때부터 시설 생활을 해온 아이였는데 6개 반 학생 중 유일하게 말을 줄에 묶어 매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다른 동물도 종류 별로 우리에 가둬놓았다. 그 아이가 사는 시설은 인성교육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악기를 배워야하는 곳이었는데 강요된 음악은 아이의 마음 속, 어떤 벽도 허물지 못한 듯 했다.
그 그림을 보면서 다시 기선이 생각이 났다. 수업시간에 환타지 소설을 쓰느라 정신없고 여자를 꾀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하는 엉뚱한 녀석. 오랜 시설 생활이 그 아이의 엉뚱함을 줄에 묶어 매어버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