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인권운동사랑방에 찾아왔을 때가 기억납니다. 당시에 저는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와 관련된 활동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방 내의 반차별 팀과 저의 일정이 맞지 않아서 참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쉬워하고 있던 찰나에, 머지않아 ‘청소노동자 노래자랑’이 서울역에서 열리게 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때부터 저는 사회권 팀에서 자원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청소노동자 노래 자랑’이 그렇게 성황리에 이루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행사를 준비하고 부스 운영을 도우면서도 제 마음 속에서는 회의를 품고 있었으니까요. ‘청소노동자들은 피곤해서 주말에 나오지 못할 것이다’, ‘끼가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등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마음의 울타리를 치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제 예상은 사정없이 빗나가 버렸습니다. 노래자랑에 참가한 청소노동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신명나 보였고 그 중에는 초대가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빼어난 노래실력을 자랑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작업복 속에 숨겨져 있던 끼’가 한 번에 분출되는 것을 보면서 저는 흐뭇함을 느낌과 동시에 아찔함을 경험하였습니다. 자원활동을 하겠다고 인권운동사랑방의 문을 두드렸으면서 정작 활동을 하면서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일삼는 제 자신 속의 모순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비단 앞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저는 자신도 모르게 가능성을 따져보고 열세에 놓여있는 선택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합리적인 기준이라는 잣대를 모종의 객관적인 심판자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죠.
‘청소노동자 노래자랑’은 성황리에 종료되었지만 저에게는 질문 하나가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왜 나는 결과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면서 습관적으로 통속적인 잣대를 들이대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습관’입니다. 인간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모방을 통해 행동을 배워 나갑니다. 예를 들어,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을 배울 때 우리는 숟가락의 기원을 따져 묻거나 왜 젓가락으로 밥을 먹으면 안 되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부모님 혹은 주위의 사람들이 숟가락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을 최대한 모방하려고 합니다. 또한, 사람이 슬프면 운다는 사실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리송해집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옆에서 울면 같이 따라 웁니다. 즉, 슬픈 감정을 먼저 배우는 게 아니라 우는 것을 먼저 배우는 것입니다. 슬픔이라는 의미는 울음이라는 행위 위에 덧씌워지는 것이죠. 이렇듯이 우리는 어려서부터 논리를 가지고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기본적인 생리와 관련된 것들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판단이나 신념 등도 비판적 사유 없이 부지불식간에 맹목적인 형태로 길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소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이 그들의 신명과 유쾌한 에너지를 소진시켰을 것이다’라고 믿었던 저 자신 또한 이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청소노동자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또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노동 환경에 처해 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패배주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들, 또한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 보탬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문제를 모르기 때문에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하는 지 알 수 없고, 원하는 바를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제시해야할지 알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련의 생각들을 거치면서 제가 완벽히 이해하고, 충분히 발 딛고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현실을 다시 낯설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다시 숟가락을 쥐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이로, 다시 울음을 배우는 어린이의 상태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왜 숟가락을 쥐는지, 왜 슬프면 우는지, 왜 청소노동자들이 힘들어 하는지에 대해서 폭넓고 치밀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고민할 수 있고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익숙했던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그리하여 그 안에 숨어있는 문제점을 제대로 직시하고 고민하기, 이것이 제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활동하면서 얻은 세상 바라보기 방식입니다. 제가 구태여 작년에 있었던 행사를 이 글에 끌어들이는 이유는 그 때의 제가 느낀 아찔함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일뿐만 아니라 낯설게 바라보는 것을 통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개인적, 혹은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기본적인 출발점이 되는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고민하는 어린이의 자세로 사랑방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가짜 어른이 아닌 진정으로 성숙한 어른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