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김삼석 씨의 모두진술서는 42쪽이나 안기부와 검찰에서의 수사과정에서 고문 불법수사 부분만을 게재하였으며, 김은주 씨의 경우는 요약하여 실었다.
<김삼석 씨 모두진술>
"그들은 세상에 자신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아야 하므로 무조건 자신들의 논리를 강요하며 불법수사로 일관하였습니다."
9월 8일 정오경, 본인은 집에서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입저지문제]에 대한 원고를 집필중 안기부 수사관 10여명에 의해 불법연행 되었습니다. 압수수색영장도 없이 본인의 '작은 도서관'인 방에서 10여간 보아오던 도서문헌들과 3년간의 군사관련자료, 일본의 군사대국화, 전후처리 관련자료, 신문스크랩, 디스켓 등 사과상자로 십수상자를 옮겼습니다. 본인은 구타에 의해 무릎이 꿇린 채로 신혼사진, 신혼비디오테이프에다 일기장, 통장, 부인의 정신대 관련자료, 비디오 등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한시간 전쯤에는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안기부의 협력자 배모 씨의 심부름으로 강모 씨에 의해 불려나온 여동생도 동시에 연행이 진행되고 있었고, 동시작전에 참여한 강모씨가 체포될 리 만무합니다. 남산 안기부로 연행되자마자 체육복으로 갈아 입혀져 17일간 동안 구타와 기합, 협박, 성추행 등이 계속 진행되었고,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북한에 언제 갔다 왔느냐', '오스트리아에서 누구와 접선했느냐', '일본에서 북한의 누구와 만났느냐', '국내연계조직을 대라'며 위협하였고, 연행 뒤 3-4일 후 시간 날짜 개념을 잊은 채 거의 잠을 자지 못하였으며, 구타와 원산폭격, 서서 무릎 쪼그리기 등의 가혹행위를 십수회에 걸쳐 당하며 유도신문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구속영장이 신청되었고, 다음날 다시 영장을 천천히 읽어보겠다며 수사책임자에게 요구하였으나 묵살되었습니다. 화장실 갈 때는 2-3명의 수사관과 동행하였고, 약 일주일 후 화장실에서 No.160의 명찰을 단 수사관이 저의 성기에 다가와 자기 손이 더럽혀진다며 치솔을 대고서 '다마 넣었나 보자' '얼마나 큰가' 하면서 '다마를 넣지 않았네'라고 한 후 자기 손이 더럽혀졌다며 비누칠까지 하였습니다. 약 열흘 후에는 수사관 No.160과 다른 수사관으로부터 잠잘 새벽에 수사내용과 상관없는 한 여성을 떠올리며 '노처녀 몇번 먹었냐' '맛있더냐'라는 수차례의 위협에 그만 하라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그들의 성적 노리개감이 되어야 했습니다.
수사 중에 '누구누구도 다 불었어' '한번 거꾸로 매달아볼까' '널 영원히 매장시킬 수 있어' '그 머리로 무슨 운동을 해'하며 수사책임자의 원색적인 인신공격과 '학생운동과는 질이 다르다'며 본인이 무슨 거창한 사건 주모자라도 되는 것처럼 몰아갔습니다.
목욕을 시킨다며 구타당한 왼쪽 가슴의 심한 통증을 가라앉히는 샤워가 하루에도 몇번씩 되었고, 협조 않으면 임신 8개월째인 부인을 연행조사 하겠다는 협박이 계속 되었고, 다른 수사관은 '동구에서 공부한 이후 우리 회사에 취직하라'며 당근질 하였습니다.
수사중에 본인의 전화와 안방대화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광범위하고도 치밀한 전화도청, 뿐만 아니라 1년여에 걸친 미행과 사진촬영 등으로 사람의 피를 말리고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폭력을 서슴치 않는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피의자 신문조서는 이미 한꺼번에 작성한 것을 날짜를 적당히 소급하여 여러 날에 걸쳐 조사된 것으로 조작한 공문서 위조 또는 변조의 범죄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일본에서 북한공작원을 만나고 왔다는 진술조서는 쌓여만 갔고, 이 조작수사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본인은 9월 20일 변호인 접견과정에서 혀를 깨물고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자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안기부 지하실을 잠시나마 빠져나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조금은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며 상처부위를 위로하였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목에 기브스를 한 채로 한밤중에 3시간여 동안 동료를 대라는 반인간적인, 동물적인 수사에 치를 떨어야 했고, 86년 10월 5공 치하에서의 고문후유증으로 아직까지 극도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문국진 씨가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수사종료 이틀 전에 수사책임자와 다른 수사관들은 '너 태어날 때 너희 부모가 북한보고 낳았지'하며 '이제 감옥생활하며 관계는 어떻게 가지냐'며 '혼자 벽보고 해야지'하면서 크게 비웃고 '한건' 올린데 대한 미소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수사는 종료되고 저의 이름앞에 '간첩'이란 두 글자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시간에 다른 방의 제 여동생은 수사관들이 '머리를 잡고 벽에 부딪히게 하거나 뺨을 수없이 때리고, 변호인 접견 뒤에는 대화내용을 다 진술하라고 닦달하면서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 중에 '이거 안되겠구만 다른 방으로 옮겨 옷 벗겨야 되겠구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볼래'라는 등 폭언과 성적 모욕을 심하게 당하였습니다.
인간이란 애당초 가련한 사람의 이야기를 더욱 즐기는 습성을 가진 동물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염치없는 동물이었습니다.
본인은 90년 10월 '보안사 민간인 사찰'을 세상에 폭로한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 이후 [보안사 안기부 치안본부 없는 세상에서 살고싶다]라는 180쪽의 자료집을 만들어 공안수사기관이 정권의 안보를 위해 경쟁하듯 전화도청, 정치사찰, 생매장사건, 학원망원, 프락치공작,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하는 반인권적인 행위를 폭로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민시대에 제가 이 자료집의 한 소재가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안기부는 변화했었어야 합니다. 헌법 제17조, 제18조에는 통신과 사생활의 비밀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공안당국에 의해 인간성을 말살하는 폭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법과 제도에 관한 무수한 경구 중에 특히 고문폐지와 양심의 자유를 강하게 주장한 몽테뉴는 그의 수상록 2권 11장, '잔혹함에 대하여'에서 인간의 잔혹성은 극도의 분노와 성적 환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진단하고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단순한 오락의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동물을 학대 고문하는 일이라고 고발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채 검찰로 이송되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검찰의 진술조서는 계속되어 갔고, 뒤늦게 행사된,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의한 진술거부권 행사에 대해 검사의 폭언과 강압과 함께 '너가 그럴 줄 알았다'며 마음대로 하라며 이후에는 입회서기가 신문조서 작성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과연 이 사건 전체에서 검사가 형사소송법에 관한 권한에 따라 사법경찰관에 불과한 안기부의 수사를 감독하였는지, 적법한 구금과 수사가 이루어지도록 감독하였는지를 검찰에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전문적인 법률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묵비권'과 '증거능력'이라는 말을 꺼내자 검사는 '어쭈 증거능력'까지라고 하며 업신여기는 마당에서는 더이상 검찰에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본인은 법에 의해 보호하기는 커녕 오로지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법기술자에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또한 검찰의 공소장은 안기부의 논리를 120%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소장의 정형화된 유치한 문구는 35년도 더 넘게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의 서두를 장식해왔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건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라 사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북한이 내세우는 주장과 선전이 영구불변하는 진리이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35년전과 꼭같은 문구로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을 감옥에 가두어 재단하는 일이 왜 여전히 계속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북한이 대남적화전략을 버리고 평화평일론으로 간 것은 오래 전의 일입니다.
이제 우리 검찰이 국제화 시대에 걸맞게 북한의 변한 모습과 북한사회의 진정한 면면을 새롭게 한번 고찰하고 조명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변에서 저를 아는 사람들은 그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여동생을 잡아가고 집을 수색하고, 책과 소지품 하물며 빈테이프까지 닥치는대로 가져간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과일대접을 하신 분이었고, 막내 여동생 또한 책을 다시 찾으러온 그들에게 여기 있다며 건네주다시피 할 정도로 따뜻하고 화목한 이러한 가정에서 저는 자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너무나 순진한 것을 안 이후 이들은 가장 비판적이 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김은주 씨 모두진술>
구치소에 와서 공소장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안기부에서 수사를 마치고 검찰에 와서도 수사내용 중에 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안기부에서의 수사내용과 똑같았습니다.
일본에 간 건만으로도 못갈 데를 간 듯이 일본에 왜 가게 되었냐, 누구를 만나러 갔느냐라고 추궁을 하였습니다. 저는 일본어를 하다보니 공부하기 위해서 갔고, 일본에는 친구도 있어 돈이 별로 들지 않아서 갔었습니다.
일본에 가서 재일동포들이 36년간의 식민지라는 아픔의 역사를 지닌 채 현재에도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고 있는 비극적 현실을 알게 되었고, 조국에서도 이들을 소외시켜 젊은이들은 귀화를 하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하는 등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였습니다. 또 우리 민족문화와 언어를 교육하는 곳이 별로 없어 민족에 대한 자긍심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국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 찾아오는 재일동포들에게 조총련과 연계되었다며 조국이 이들에게 준 것은 0.7평 감옥이었습니다. 친척들도 거의 없어 이분들은 거의 보살핌 없이 지내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제 재일동포들을 남북분단의 정치희생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의 사건은 안기부의 과대포장, 조작, 함정수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본에 가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지령수수가 되고, 말지나 비행기에서 읽으려고 산 신문들은 목적수행 및 국가기밀누설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온 와타나베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는 안기부에서 미리 써가지고 계속해서 반복하여 세뇌시켰습니다. 저는 수사관들의 폭력과 위협 앞에서 그들이 짠 각본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10여명의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9월 8일 강남터미널에서 연행되어 남산 안기부 지하실로 끌려가 군복으로 갈아 입히고 수사를 받았습니다. 영장제시를 요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3일동안 잠을 거의 재우지 않아 내 자신을 지킬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너희 남매가 여기 끌려온 것을 누구도 모른다. 시체가 되어 나가도 모른다'는 말을 하여 오빠도 잡혀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끝났으니 사실대로 이야기하라며 주로 외부에 상처가 나지 않는 머리나 등에 폭력을 당했고, 구둣발로 채이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이거 안되겠구만 다른 방으로 옮겨 옷 벗겨야 되겠구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볼래'라며 위협하였고, 또한 수시로 성적 모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남매의 정을 이용하여 오빠에게 더욱 고통을 주겠다며 협박을 하기도 하였고, 날이 갈수록 저는 수사관들의 의도대로 간첩이 되어 갔습니다.
수사과정에서 알게 되었지만 사생활이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가게에서 친구와 전화통화한 내용이나 식당에서 여러 친구와 나눈 잡담 등도 알고 있었습니다.
9월 8일 연행되기 2일전에 남누리영상 대표 배인오가 '모래 일본에서 손님이 오는데 한국말을 전혀 못하니 통역을 부탁한다'고 하여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자꾸 부탁하여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하였고, '강이라는 사람이다'고 하였습니다.
9월 8일 아침에 '강이 보낸 사람이다'는 전화가 왔는데 한국말을 너무 유창하게 하여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배인오에게 연락을 하였으나 통화가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나갔다가 안기부에 연행되었습니다.
안기부에 가서 안기부 직원이 많았는데 물건을 건네준 사람은 왜 놓쳤냐고 물었더니, 쫓아가다가 놓쳤고 너한테 신경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으나, 제가 본 사람은 50대 후반의 사람이었고, 10여명이 넘는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쫓아가다가 놓쳤다는 말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사건은 안기부의 계획된 프로그램입니다. 배인오를 안기부의 프락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 5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수사과정에서 배인오가 알고 있는 내용을 물어보면서도 배인오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둘째, 제가 배인오가 부탁해서 나갔다고 이야기해도 다른 사람을 대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배인오와 한총련간부와 제가 왕십리 부근에서 만났을 때 안기부 수사관이 옆자리에 있었다고 하면서도 배인오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습니다.
넷째, 왕십리에서의 우리들이 만나는 사진을 보여줄 때도 배인오 부분은 가리고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제가 연행될 당시의 상황을 볼 때 배인오가 프락치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