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인권현장에서 뛰는 사람들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인권위원회 간사 고상만

내 가족과 이웃이 더불어 아름답게 사는 꿈을 위해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인상을 단무지(단순, 무식, 과격의 성품을 가진 운동가를 지칭하는 속어)로 단정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일에도 목을 매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도 이런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달리 흥분하는데 시간이 필요 없다." 하지만, 이렇게 단정짓는 것은 큰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는 쉽게 흥분하는 만큼 의욕과 정열로 넘친다.

어딘가에 인권 사건이 발생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수사관들에 비해 몇십배나 큰 사명감으로 현장을 뒤지고, 피해자의 증언을 청취한다. 때로는 변호사들에게 법률적인 조언도 듣고, 때로는 선배 활동가들의 자문도 구하면서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추리해간다.

95년말 발생한 경원대 장현구씨의 분신과 그로부터 이어진 학교의 탄압, 학생들에 대한 징계와 구속, 지난해 9월 발생한 경원대 송광영열사 추모비 탈취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는 성남지역으로 무시로 오르내렸다. 분신현장에서부터 대공분실, 법원, 변호사 사무실로, 인권단체 사무실, 농성장으로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따라서, 그는 결코 단무지가 아니다. 오히려 열정적인 인권운동가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운동하는 것은 곧 죽음일 수도

그가 바로 오늘 소개하는 고상만(28) 전국연합 인권위원회 간사다. 하지만,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그는 결코 순탄한 길을 걷지 못했다. 강원도 속초의 동우전문대는 학원 폭력이 극심했던 학교였다. 거기서 보고 배운 것은 대학 안에도 깽패들이 대낮에 칼과 낫을 들고 설칠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런 폭력에 맞서 이기는 것은 학우들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늘 인권 피해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 학교 학생처가 바로 학원 폭력배의 조정실이었고, 그의 사주를 받은 폭력학생과 시내 깡패들한테 때로는 설악산으로 때로는 속초 바닷가로 납치되어 '죽지 않을 만큼 얻어 터지곤' 했다. 그때마다 그도 칼과 낫을 쥐고 싶었지만, 학생처와 총장실 점거, 꾸준한 학우들에 대한 설득과 홍보, 조직활동으로 이를 극복했다. 그러던 89년 말 드디어 이런 폭력을 뚫고 자주학생회가 출범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승리는 곧바로 김용갑 총학생회장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91년 정연석 동아리연합회장의 분신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운동하는 것은 곧 죽음일 수도 있는 공포 속에서 그는 도리어 단단해졌다.


전국연합에서 인권운동가 꿈 키워

그런 그가 속초를 떠나게 된 것은 91년 김기설 열사의 분신 사건 이후였다. 정연석씨 분신 사건 당시 고 김기설 씨는 전민련에서 활동하면서 서준식 당시 전민련 인권위원장(현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고상만 씨의 끈질긴 요구에 결혼식 주례도 맡았다)과 함께 조사작업과 항의운동을 도왔던 인물이다. 이를 계기로 서씨와 인연을 맺게된 고상만 씨는 이후 전민련 활동과 유가협 활동을 하면서 사회운동의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하지만, 93년 5월 사랑하던 후배(현재 아내)와 사이에 2세가 생기면서 복학을 하고,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학교를 마친 후 잠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벌이를 1년 남짓 하다가 들어간 곳이 전국연합 인권위원회였다.

처음 그는 그곳에서 인권운동가로서의 꿈을 본격적으로 키워나간다. 하지만, 처음엔 너무도 절망스러웠다. 인권운동이 구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