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의 인권
100인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받은 가장 뜨악했던 질문 중의 하나는 왜 100인 위원회 회원명단을 공개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공개를 할 이유도, 안 할 이유도 없다는 공식 멘트 외에 “왜 민주노총에게는 40만 조합원 명단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으시죠? 그리고 저는 유령인가요?”라고 가볍게 응수하곤 했다.
그러나 최근 KBS노조 강철구 부위원장이 100인 위원회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100인 위원회 내부에서도 명단공개 여부를 놓고 간단하게 토론을 벌였다. 평소 위계를 지양하는 개인들간의 자율적․수평적 네트워크를 지향해왔던 조직운영 원리상, 고소의 대상이 특정 100인위 성원으로 제한되는 것을 거부하고 회원 전체 공동책임을 주장하고자, 전원이 진술서를 가지고 검찰에 출두했기 때문이다. 검찰에 회원전체 실명진술서를 낸 만큼, 차제에 100인 위원회 실체에 대한 여러 억측도 불식시킬 겸 회원명단을 공개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있었다.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하기까지는, 100인 위원회 회원으로 있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피해자에게 적대적인 환경에서 보호조치를 강구하기 힘들다는 점이 설득력 있게 작용했다.
이 판단을 현실 속에서 확인하기란 불행하게도 쉬운 일이었다. 강철구 부위원장에게 명예훼손 고소를 당한 피해자들이 검찰조사를 받으며 다시 확인한 것은 이렇다. 검찰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성폭력 피해자는 조사과정에서 다시 강간당한다”는 말이 현실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검찰은 성폭력 사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갑작스럽게 가해자와 대질심문을 벌이는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였다. 또한 검사는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나. 주장하는 바가 합리적이지 않다. 장소는 정확하게 기억하면서 시간과 날짜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라고 계속 추궁하고, 수년 전에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사실입증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등 시종일관 강압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로 심문했다고 한다. 성폭력 가해자인 고소인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물론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벼랑 끝에서 마지막 호소를 했다는 이유로 피고소인이 되어 검사와 가해자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더 기막히다 할 수 있지만, 피해자로서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인권이 좌우(左右)를 막론한 가부장의 연대 앞에 꼼짝없이 유폐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금 내가 되묻고 싶은 것은 성폭력 피해자가 포함되어 있는 100인 위원회 회원명단이 공개될 경우, 당신들은 이런 적대적 환경으로부터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엄혜진(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