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인권영화제는 5.5회라는 다소 이채로운 회수를 붙였다. 의미를 따져보자면 지난 5년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의 변화를 모색해 보자는 뜻. 그래서 6회로 나아가지 않고 그 사이에 잠시 머무는 것이다. 5년 동안 숨차게 달려온 인권영화제는 이제 온고지신의 지혜가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모두 19편의 ‘다시 보는 명작선’은 96년부터 시작된 인권영화제를 일별하는 좋은 기회이다. 96년부터 작년까지 5회 동안 상영된 작품은 모두 162편. ‘명작선’의 선별은 먼저 관객의 찬사와 영화적 가치가 뛰어난 수작들을 골라봤다. <칠레전투> <대지의 소금>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볼리비아 일기> <하비 밀크의 시대> <쇼아>등이 그렇다. 더불어 ‘꼭 다시 한번’ 보여주고 싶은, 즉 인권영화제가 권하는 영화도 포함되어 있다. <배신의 시간 속에서> <날 놓아줘> <레지스탕스> <스코츠보로, 미국의 비극>이 그에 속한다. 99년부터 시작된 올해의 인권영화상 수상작 두 편도 이번 영화제를 통해 다시 볼 수 있으며, 역대 상영되었던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을 감상할 수 있는 ‘애니휴먼’도 언급하고 싶은 프로그램이다.
명작선을 시대순으로 살펴보면, 96년에 상영된 작품은 <하비 밀크의 시대> <유령을 부르며> 등 4편. 진보적인 게이 활동가 하비 밀크의 생애를 다룬 <하비 밀크의 시대>는 많은 이들이 다시 보고 싶어한 영화중 하나이다. 동성애 운동을 이해하는데 ‘교과서’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 국내 동성애 운동에 영향력있는 케이스 스터디였을 것. 레이건 시대 임금삭감에 대항한 장기파업투쟁을 담은 바바라 코플의 대표작 <미국의 꿈> 역시 자본의 횡포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정서를 보편적으로 담은 작품으로 노동자들에게 남의 일같지 않은 공감을 일으켰다. 칠레 피노체트 독재 당시 체포되어 18년 동안 프락치로 살아야 했던 여인 라 플라카 알레한드라의 통한의 증언을 다룬 <배신의 시간 속에서>는 독재의 역사와 저항하며 살아온 민중운동가들에게 통곡의 사연으로 가슴 깊이 남아있을 것이다. 지난 2월 유고 전범 재판 판결로 전시여성강간 문제는 다시 한 번 세상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유령을 부르며>는 피해여성들의 일기장인 양 그들의 심리를 들추어 보이고 있다.
<쇼아>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97년 2회 대표작이 바로 <쇼아>.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구속되어 실형을 산,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미증유’의 사건이 있었던 그 해 <쇼아>는 최대 피해작이었다. 9시간 30분이라는 상영시간은 안정적인 상영조건에서도 쉽지 않은 강행이었을 것을 당시 인권영화제는 당국의 탄압으로 상영장이(홍익대학교) 봉쇄당하고 학교 여기 저기서 ‘게릴라 상영’을 감행해야 했었다. 그 때를 떠올려 보자.
“관객여러분 죄송합니다. 상영장이 봉쇄돼 <쇼아>는 미술대 옆 롱다리 계단에서 상영됩니다.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약도를 참고하셔서 찾아오십시오.” 제2회 개막식에 찾아온 용감한 관객들은 홍대 미술대 옆 롱다리 계단에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상영장이 봉쇄되자 홍대 총학생회에서 궁여지책으로 물색한 상영장 롱다리 계단, 꽉 채운다면 2백석이 족히 될 계단에 앉아 9시간 30분의 대작 <쇼아>를 기다리는 관객들. 그러나 스크린을 설치하고 스피커의 볼륨을 맞추고 플레이해도 영화는 스크린에 나타나지 않았다. 가을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스크린은 축제의 흥겨움을 심란하게 뒤흔들어댔다. 마이크를 잡은 김동원 감독이 곤혹스럽게 입을 뗀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아 스크린에 영상이 잘 뜨지 않습니다….” 때는 가을의 한복판, 해가 지는 걸 기다리기엔 시멘트 바닥은 너무 차가왔다. 관객들은 기다림에 지치기 시작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김혜준 씨(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실장)와 나는 앞 건물로 뛰어들어가 강의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작은 강의실이라도 찾기 위해. 빈 공간은 휴게실뿐이었다. 유리창에 검은 마분지를 서둘러 붙이고 스크린과 기자재를 황급히 옮겼다. <쇼아>의 첫 상영은 상영장을 옮기고 또 옮겨 30명도 채 앉을 수 없는 작은 휴게실에서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 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관객들은 발걸음을 돌렸다. 이후 영화제 폐막 하루를 앞두고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홍대일정을 끝내야 했다.
<쇼아>가 인권영화제를 통해 번듯한 극장에서 상영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유태인 학살을 증언자들의 목소리만으로 그 긴 시간을 가득채우고 있는 경이로운 영화 <쇼아>를 극장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을 제외하곤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다. 영화제는 21일(월) 하루를 ‘쇼아의 날’로 정하고 하루 종일 작품을 상영할 계획이다.
탄압중에도 관객들에게 따뜻한 웃음을 전해준 <시가라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상영된다. 시가라키(信樂)에는 약 2천 명의 노동자가 있으며 그 중 106명이 정신지체 장애인. 이들은 보통 10년 이상 이곳에서 직업을 얻어 살아왔다. 인간의 논리가 적용하는 환경에서 이들은 ‘불운한 인간’이 아닌 ‘그냥 사람’이 된다.
98년 영화제를 개최하기 전 많은 이들이 걱정의 목소리를 보냈다. ‘지난해 그렇게 모진 탄압이 있었는데, 올해 순조롭게 개최할 수 있겠냐’는. 영화제를 준비하는 인권운동사랑방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가슴 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