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공교육, 방치된 아이들
지난 10월 24일부터 올해 2월 16일까지 필리핀에서 인권 연수를 한 고근예 상임활동가가 쓰는 필리핀 인권기행을 앞으로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질 높은 교육?"
필리핀의 한 공립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교실 벽에는 '질 높은 교육'이란 표어가 붙어 있었다. 방문을 주선했던 필리핀 담당자의 시선이 그 표어에 멈췄을 때 그녀는 살짝 눈살을 움직이며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녀의 태도가 의아하게 생각됐지만, 교사들로 구성된 교육운동단체 액트(Alliance and concerned teachers Phillipines)를 방문하면서 그 궁금증이 풀렸다.
액트의 레이몬드 사무국장은 필리핀 공립학교의 현실을 "책상이 없고, 칠판이 없고, 교실이 부족해서 일주일에 3일만 수업을 하고, 교과서 1권을 7명의 학생이 나눠봐야 한다"고 묘사했다. 심지어 공립학교 중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학교의 비율이 25%나 된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교사들은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2-3개 학년을 한꺼번에 담당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열악한 여건에서 질높은 교육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편, 필리핀 정부는 교육내용에 대해 초·중등 교과를 5개로 축소, 인문사회를 통합하는 반면, 수학과 영어 시간을 늘리는 '새천년 교육과정'을 개혁방안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액트는 정부가 '국경없는 교육'이라 선전하고 있는 새로운 교육과정 역시, 미국이나 외국자본의 이해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레이몬드 사무국장은 필리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심지어 대학을 졸업하고도 미국이나 영국, 홍콩으로 가정부로 나가면 다행이라고 여기는 상황을 지적하면서,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교육을 본떠 영어 교육만 강조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교육이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교마저도 모든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통게에 따르면, 필리핀의 초등학교 입학생 10명중 6명만이 학교를 끝까지 마치고, 그 중 3명만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 통계를 증명이라도 하듯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은 어디서든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교복도 없고, 돈도 없어, 학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어요"
2월 초, 민다나오 섬에서 만난 14살의 넨넨이라는 소녀는 '학생이냐?'는 질문에 이처럼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나도 학교에 가고 싶긴 해요"라고 덧붙였다. 넨넨은 어느 집의 가정부 일을 하고 있었다. 학비는 무료였지만 교복과 책이 없는 넨넨은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었고, 아무도 그녀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지 않았다. 필리핀의 북쪽 도시 바기오에 있는 한 마을을 찾아갔을 때 만난 한 부인 역시, 6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지만 그 중 2명만 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학비 이외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단지 2명의 아이만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대체 무엇을 하냐는 질문에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들은 부패에 찌든 정부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한쪽에는 올림픽 규모의 수영장을 갖춘 사립학교가, 다른 한쪽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공립학교, 그리고 교문밖에는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이 공존하는 필리핀, 이 곳에서 국가의 책임이란 자취를 감춘 듯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규교육에 기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은 산 속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생존을 위한 교육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산 속 마을 카뉴마이에는 지난 2001년 4월까지만 해도 공립초등학교가 하나뿐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카뉴마이에는 작은 비정규 고등학교가 만들어졌고, 3명의 자원봉사 교사와 14살에서 21살까지의 30여명의 청소년들이 이 카뉴마이 고등학교의 주인이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진학할 수 없었던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과 지방자치단체 심지어는 산 속의 반정부군들까지도 환영하는 학교가 들어선 것이다.
지난 해 12월 11일부터 14일까지 카뉴마이 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는 마침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학생들은 한 칸뿐인 교실 안쪽에 그 간의 배움의 흔적들을 보여주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교실 벽에는 마닐라 시내에 다녀와서 그린 그림이며, 영어 받아쓰기 시험지가 붙어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사탕 껍질로 된 커다란 별과 탁자에 놓인 깡통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는 산 속 마을의 가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교사를 맡고 있는 밴지는 "이 학교에서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여 기존의 교육과정을 새롭게 정리해 만든 자신들의 교육내용은 농촌에서 가장 필요한 지식으로, 더 이상 생존을 위협받지 않기 위한 교육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사들은 "지금 추진하는 교육이 학생들 안에서 교사를 재생산하고, 마을의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적 여건을 향상시키는 데까지 담당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과 지원 속에 당연히 계획되어야 할 학생들의 교육이 민간의 힘만으로 지속될 수 있을지 물음표를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