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가해자, ‘명예훼손’ 역고소 남발
지난 22일 성폭력 피해 여성과 피해 아동을 주제로 각각 다른 장소에서 열린 토론내용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최근 성폭력 피해자가 형사절차에서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명예훼손을 한 피의자로 법정에 서게 되는 일이 잦다. 성폭력 추방운동에 대한 명예훼손 역고소 공대위 등은 22일 낮 2시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토론회를 열고 이런 상황을 낳는 현실에 대한 진단과 법률적 대안을 논의했다.
성차별판결 모니터링 모임의 장임다혜 씨는 “성폭력은 대개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만이 있을 때 발생하는 특수성과 재판부의 남성중심적 태도로 인해 성폭력 사건을 법에 호소하는 경우 승소률이 매우 낮다”라며 “가해자들은 이같은 점을 역이용해 피해자와 지원하는 여성단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장임 씨는 경북대 L교수, 동국대 김모 교수, 죽암휴게소 박모 씨, KBS 노조 강모 씨, 제주 우모 지사, 소설가 박모 씨 등 15건의 사례를 분석 발표했다. 대부분 가해자의 고소에 의해 성폭력 피해자나 여성단체 활동가 등의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검찰 조사나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이다. 심지어 1월 노동청에서 성희롱 판정까지 난 죽암휴게소 사건의 피해자는 명예훼손 혐의로 6월 구속되기도 했다.
박선영 교수는 “가해자가 성폭력 피해자나 시민단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행위는 위협과 협박의 수단으로 법을 악용하는 것”이라며 “공인과 관련해선 명예훼손 혐의를 받는 피의자가 그런 의혹의 제기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정황이 있다는 걸 제시하는 것으로 진실성과 상당성에 대한 입증부담을 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성폭력 사건의 재판과 관련, 조국 교수는 “우리 형사절차는 성폭력 피해자 여성을 품행이 방탕한 자와 순결하고 정숙한 자, 두 유형으로 나눈 뒤, 피해자의 상당수를 전자로 간주, 이들을 의심하고 추궁한다”며 “수사기관과 법원은 사실 남성중심적 관념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조 교수는 “피해자의 ‘재피해자화’를 막고 재판의 초점을 피해자의 도덕성이 아니라 피고인의 유죄문제로 맞추도록 하는 입법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미국의 강간방지법을 참조해 성폭력 피해자의 과거 성이력과 성향이 형사재판에서 사용되는 것을 제한하는 조치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는 “법원이 전제하는 ‘평균인’으로서의 ‘합리적 인간’ 기준은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에선 남성편향적일 수밖에 없고 성희롱 판단에서 여성의 경험을 배제한다”며 “성폭력 사실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합리적 여성’ 개념을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