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 인권단체들이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공동대책위'를 결성하고 활동에 돌입했다. 이에 본지는 매주 1회씩 총 6회에 걸쳐 사회보호법의 실태를 짚어보고 대안을 모색해본다. <편집자 주>
사회보호법의 역사는 2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0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사회정화'라는 미명하에 '불량배 일제검거에 관한 계엄포고 13호'를 발동했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6만7백여명이 검거됐고, 이중 4만여명이 삼청교육대에 강제 입소돼 '죽음의 순화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15세의 학생을 비롯해 주부와 교사, 언론인 등 아무 죄없는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끌려갔으며, 삼청교육대에서는 무자비한 폭력과 참혹한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이듬해 1월 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폭압'은 계속됐다. 신군부가 삼청교육대생들을 사회로부터 장기 격리시킬 목적으로 80년 12월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해 사회보호법을 제정, 이들에게 보호감호처분을 부과한 것. 그 결과 총 7,478명이 재판절차나 어떠한 사전통지도 받지 못한 채 보호감호라는 명분하에 다시 군부대에 수용됐다. 그리고 이들 중 정부 기록만으로도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서야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81년 12월 청송보호감호소(이하 청송감호소)가 완공되면서 군부대에 수용됐던 피감호자들이 이감되기 시작했고,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친 사람들도 함께 수용됐다. 삼청교육대의 광기가 청송감호소로까지 이어지면서 피감호자들의 반발도 거세어졌다. 이들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보호감호 철폐, 교도관 폭행 근절, 재소자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자해를 불사하며 참혹한 청송감호소의 실상을 사회에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보복은 무자비했다. 84년 시위 주동자로 지목된 피감호자 박영두 씨는 교도관들의 폭행으로 끝내 사망했고, 이러한 사실을 바깥 세상에 알리려던 동료 피감호자들은 모진 고문 후 추가형을 선고받거나 빛도 들지 않는 독방에 몇 년이고 갇혀 있어야 했다. 수용자들의 시위는 매번 최루탄과 군화발로 진압됐다.
88년 민주화의 흐름을 타고 청송감호소의 실상이 세상에 하나 둘 알려지면서 한때 사회보호법이 개폐될 수 있는 호조건이 형성됐다. 대법원의 위헌제청에 이어 대한변협과 평화민주당도 "보호감호는 실질적으로 형벌과 동일하여 이중처벌에 해당하므로 개정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계기로 일정 요건만 충족되면 무조건 보호감호가 부과되던 필요적 보호감호규정이 삭제되고 법원에서 보호감호처분을 부과하도록 했고 보호감호의 대상 범죄도 축소됐지만, 사회보호법의 대대적 개정이나 폐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후 96년까지 진행된 4차례의 개정 역시 요식행위에 그쳤다.
91년과 2002년에는 사회보호법의 위헌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이 진행됐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형벌과는 다른 독자적 의의를 가진 사회보호적 처분"이라며 두 차례 모두 합헌결정을 내렸다. 단지 91년 당시 헌법재판소 재판관이었던 변정수 재판관만이 "피감호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청송보호감호소나 보호감호 대용시설의 실태가 교육개선보다는 혹시 이들을 영구히 치료될 수 없는 인간쓰레기로 보아 단순히 사회로부터 격리시키자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합헌 결정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피력했을 뿐이다.
한국판 아우슈비츠 악명을 떨치며 철옹성을 자랑하던 청송감호소는 90년대 후반 윤 모, 유득형, 대도 조세형 씨 등 피감호자들이 잇따라 인권침해 실상을 폭로하면서 10여년 만에 다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사회적 지탄 여론에 못 이겨 사상 최초로 청송감호소를 인권단체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 뒤 지루한 폭로와 공방이 계속돼오던 가운데 지난해 청송감호소에 있는 피감호자들은 93년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를 조직, 세 차례에 걸친 단식농성을 통해 '사회보호법 폐지'라는 타전을 세상을 향해 보내왔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 인권단체들도 사회보호법 제정 이후 최초로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연대기구를 지난 11일 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이로써 피감호자들의 피로 검게 물든 사회보호법이 다시 한번 존폐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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