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선언문 도출 실패…이경해 씨 유해 18일 도착
이경해 씨를 죽음으로 내몬 WTO 5차 각료회의(아래 칸쿤회의)가 결국 결렬됐다. 99년 3차 각료회의가 시애틀 시가지를 점령한 각국 반세계화 활동가들에 의해 무산된 데 이어 이번 회의마저 무산돼 전지구적 자유무역을 향한 WTO의 의도가 또 한번 꺾인 셈이다.
WTO는 지난 10일(아래 현지시각)부터 14일까지 멕시코 칸쿤에서 각료회의를 열어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 의제를 중간 점검하고, 협상의 세부 원칙을 논의했으나 최종 선언문 도출에는 실패했다.
이에 앞서 13일 의장이 배포한 선언문 초안은 개발도상국에 대해서도 농산품 관세를 스위스 공식(관세 높은 품목은 관세를 더 많이 낮춤)에 따르거나, 5% 이하로 대폭 인하하도록 했다. 이는 관세가 100%를 넘는 품목이 142개나 되는 한국 농업의 몰락 위기를 의미했다. 또한 특정 품목에 보조금을 집중할 수 없도록 상한선을 설정해, 전체 보조금의 90%가 쌀에 지급되는 한국 농업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됐다. 이에 전국민중연대는 "전면적인 농업개방으로 농민을 말살시킬 선언문 초안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칸쿤협상 중단과 한국 대표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결국 이 선언문 초안은 폐기됨으로써 농민들은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이번 칸쿤회의 결렬 계기는 '싱가포르 이슈'였다. 14일 아침부터 열린 비공식 회의에서 '싱가포르 이슈' 협상을 개시하자는 측과 협상 자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측이 평행선을 달리자 의장이 결국 합의 실패를 선언하고 회의를 종료한 것. '싱가포르 이슈'는 전세계적 투자와 금융거래의 자유화를 보장하는 '투자자유화협정'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번 회의에서 최종 통과를 앞두고 있던 TRIPs협정(무역관련지적재산권 협정)의 경우도 마찬가지 운명에 처했다. 지난달 30일 나온 사전 합의안은 특허 의약품에 대한 강제실시 수혜국의 범위를 최빈국으로만 한정하고 그 절차도 까다롭게 해 거센 비판 여론을 불러들인 바 있다. 의료, 교육 등 공공서비스의 사유화를 목표로 하는 서비스협상의 경우, 서비스 개방 계획서인 1차 양허안 미제출국에 대해 조속한 제출을 촉구하는 정도에 머물러 아직 본격 협상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편, 전국민중연대와 전농 등 한국의 민중운동 진영은 칸쿤회의를 저지하기 위해 2백여 명의 '칸쿤 현지투쟁단'(아래 투쟁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고 이경해 씨는 회의 개막일인 10일에 맞춰 열린 '국제공동농민행동의 날' 시위에서 "WTO가 농민을 죽인다"는 선전물을 가슴에 단 채 회의장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이 쳐 놓은 바리케이드 위에서 지니고 있던 칼로 자결했다. 투쟁단에 의하면, 그의 죽음 이후 경찰 바리케이드 앞에서 천막농성이 시작됐고, 그의 죽음을 기리는 촛불시위가 매일 열렸으며, 각국 농민단체들의 연대투쟁이 잇따랐다. 이 씨의 유해는 18일(한국시각) 한국에 도착, 이후 장례는 '세계농민장'으로 치러질 전망이다.
칸쿤회의 결렬에 대해 전농은 "비인간적인 세계화를 저지하기 위해 칸쿤에 모인 반세계화 진영의 투쟁과 자결로서 항거한 故 이경해 씨의 피의 결과"라며, 한국 정부에 추가적인 농업개방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칸쿤회의는 결국 결렬되었지만 WTO 협상 자체가 취소된 것은 아니다. 칸쿤회의에서 중간 점검을 했던 DDA 협상은 계속되며 올해 12월 15일 이전까지 제네바에서 고위급 일반이사회가 개최돼 이후 필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이 회의에서 향후 협상 일정 등 로드맵을 다시 만들어 협상을 재개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