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움틈] '점유'와 '사용'을 통해 배타적 소유에 균열을 내다

공간을 둘러싼 불평등 구조는 이것을 많이 더 소유한 사람에게는 사회적 권력을 부여하는 반면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사회적 배제와 소외를 경험하게 한다. 가난한 예술가는 작업실이 없어 예술을 포기하고, 높은 주거비 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시설과 거리를 유랑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사회에서 예술가와 노숙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스쾃'이라고 불리는 빈집점거운동은 '점유'와 '사용' 이라는 방식을 통해 공간에 대한 양극화와 불평등 구조에 균열을 내고 있다. 이들의 삶은 "또 따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말이 구호가 아닌 구체적인 실천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어 '운동의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출처] '오아시스프로젝트' 홈페이지 oasis.cyworld.com

▲ [출처] '오아시스프로젝트' 홈페이지 oasis.cyworld.com



예술인회관을 점거한 예술가들

지난 2004년 8월 15일 이른바 '예술가'들 20여명은 '목동예술인회관'을 점거했다. 목동예술인회관은 건축주인 예총이 국고의 지원을 받아 건설하려던 지하 5층 지상 20층 (임대용) 건물로 예술인들의 창작지원이라는 애초 취지와는 달리 임대사업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건축비리와 부도까지 겹쳐 6년째 흉물로 방치되어 있었다. 예술가들은 폐허로 방치된 공간을 '공공'의 이름으로 점유해 사회적으로 문화와 공간의 공공성을 이슈화시켰다. 즉 예술인회관이 "예술가와 시민을 위한 실제적인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점거의 이유였다. 이들은 13시간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목동예술인회관' 안팎에서 다양한 포퍼먼스를 전개했다. 이들은 작년 6월 18일 한겨레신문에 목동예술인회관 분양광고를 내서 이 건물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렸고, 7월 17일 목동예술인회관 공사현장 점거시도를 위해 굴삭기를 동원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점거 이후 <오아시스프로젝트> 작가 20여명은 불법 주거침입죄 혐의로 검찰에 고소고발 됐다. 법원은 2005년 6월 3일 <오아시스프로젝트> 예술가 10명에게는 벌금형을 선고했고, 7명에게는 선교유예를 판결했다. 현재 점거에 참여했던 예술가 20여명은 좋은 판례를 남기기 위해서 항소를 준비 중이다. 예술가들의 점유를 통해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목동예술인회관 건립 사업은 감사원의 감사를 받기도 했고, 국고로 투여된 50억원이 환수되기도 했다. 그러나 6년째 목동예술인회관은 목동의 흉물이 되어 방치되어 있으며 국민의 세금 165억은 아직까지 환수되지 못하고 있다.

폐허로 방치된 목동예술인회관에 생명의 향기를 넣은 <오아시스프로젝트>는 일명 '공간 재생 프로젝트'라 불린다. 사막 같은 현대도시에서 오아시스 같은 존재를 지향하며 예술가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삶과 예술 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 이들의 운동적 지향은 문화와 공간의 공공성 확보에 있다. 사유화된 문화와 공간의 영역을 시민들에게는 문화를 향유하도록 하고,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의 자유를 주자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의 점거운동은 철저하게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과 필요에서 출발해있다. 한국사회에서 대개 예술가들은 변변한 작업실 하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술을 포기하거나 먹고 사는 일에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다. 예총이 예술인을 위한 회관을 건립한다면서 실재로는 임대사업을 구상한 것에 대한 이들의 분노가 불법적인 '점거' 라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 예술가 중 50%가 넘는 사람들이 월수입이 10-20만원을 넘지 않고 44.6%가 10만원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오아시스프로젝트> 김강 씨는 "(예술가는) 자신의 근본적 정체성과 확인할 수 있는 공간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이는) 예술가들의 실존적인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오아시스프로젝트>에 예술가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활동이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넓힐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예술생산자, 이론가, 시민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활동인자를 포괄하고 있는 점이 큰 힘이 된 것. 지난 3월 시민사회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목동예술인회관 건립사업 정상화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도 구성된 상태이다.

삼일아파트 전경

▲ 삼일아파트 전경



삼일아파트를 점유한 노숙인

8월 철거예정인 삼일아파트를 점유해 거주하고 있는 송재희 씨는 1년 전까지만 해도 노숙인이었다. 자그맣게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 큰 빚을 지고 난후 얼마간의 노숙생활을 거쳐 이곳으로 오게 됐다. 얼마 전까지 삼일아파트에서 거주했던 임진택 씨도 송재희 씨와 비슷한 사정이다. 저녁에는 지하도에서 잠을 청하고 낮에는 전철을 타고 이리로 저리로 가고 오며 시간을 보냈다. 노숙인 쉼터에도 들어가 보았으나 지켜야할 것이 너무 많아 적응하기 힘들었다. 공동생활에 따른 시간엄수, 금주 등의 규칙, 노숙인들 내 구타 경험이 임 씨에게 시설을 선택하지 않게 한 충분한 이유가 됐다. 송재희 씨, 임진택 씨는 2004년 여름, 가을 빈민운동가 김연수 씨의 권유로 철거예정인 삼일아파트에 들어와 점유를 시작했다. 그때는 지금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도 거리보다는 쉼터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으로 시작했다. 집 없는 노숙인 당사자들이 도심에 비어있는 공간을 점유해 거주하자 이들의 삶이 조금씩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세인의 관심을 이끌었던 것은 <더불어사는집>이라는 나름의 '공동체'를 만들어, 시설에서 느꼈던 불만과 불편을 극복,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약속-음주, 입출입 등-을 만들어내고, 폐휴지 등을 수집, 기증받아 되파는 방식을 통해 자활을 일궈내고 있던 점이었다. 무가치하고 무능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노숙인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비어있는 공간에 들어가 '대안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시에서 임진택 씨에게 보낸 공문

▲ 서울시에서 임진택 씨에게 보낸 공문



현재 거주자들은 삼일아파트 2동 3층에 살고 있지만, 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10여 개월 동안 구청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구청직원은 갑자기 들이닥쳐 이들을 내쫓기 위해 온갖 행패를 일삼았다. 유리창문을 부숴 잠을 잘 수 없게 하거나, 단전단수를 실시해 먹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삼일아파트 거주자들은 구청직원의 물리력을 버텨냈고 이 소식을 들은 노숙인들이 하나둘 들어와 함께 살기 시작해 지금은 17명이나 된다. 송재희 씨는 "처음에는 솔직히 구청직원이나 경찰이 오면 숨기에 바빴다. '싸워라 너희 권리인데 왜 못 찾냐! 너희 밥그릇도 못 찾으면 살지 마라'고 독촉 받을 때도 두려웠다. 그런데 한번 두 번 싸우다 보니, 노하우가 생기더라. 한가지 한가지 성취해나가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당시에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겁이 났고, 구청직원이 무서워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 늦게 들어와 부수어 놓은 살림살이를 매번 치우고 다시 잠을 청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구청과 잠정합의로 이들은 8월말 삼일아파트 철거까지는 이곳에 거주하는 것을 용인 받은 상태. 그런 탓인지 송씨의 표정과 살림살이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보였다. 송 씨는 "노숙생활 할 때보다는 마음이 안정이 된다"며 "이런 점거운동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간 노숙 경험을 통해 정부나 지자체가 노숙인을 혐오하고 있으며 그나마 노숙인들이 서울역 같은 곳에서 있으며 기껏해야 3시간밖에 못자고 공안들에게 쫒기기에 바쁘다고 토로한다. 또한 구청직원은 시설로 들어가라고 윽박지른다. 송 씨는 "(노숙인들을) 거리로 내몰기 보다는 비어있는 건물을 임시적으로나 (이들이) 사용할 수 있게 허가해 달라"고 주문한다. 삼일아파트 거주자들은 8월 이후 살 공간을 물색하고 있다. 그 공간에서 또 투쟁하며 살아갈 것이다.

삼일아파트 복도

▲ 삼일아파트 복도



서유럽의 스쾃운동

스쾃(Squat:점거)은 버려지거나 방치된 공간을 점거하여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목동들이 자신의 초지가 아닌 곳에서 양떼를 몰고 가서 양을 멕이던 행위에서 비롯된 이 단어는 1835년경 산업혁명 시기에 사회적 의미를 띈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과정 중에서 농촌이 붕괴되고 많은 수의 노동자가 도시로 유입되어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생존권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잠잘 곳 없어서 처마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자연스런 형태로 스쾃은 출발한다. <오아시스프로젝트> 김강 씨는 "과거 대지주와 브르조아들이 잉여의 공간으로 남겨두었던 빈 건물 등을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가난한 도시노동자들이 스며들어가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 스쾃"이라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비어있는 빈 공간의 점유를 통해 계급적 각성을 이뤘었고, 20세기에 이르러 빈집점거운동은 집 없는 사람들에게는 주거권 운동으로, 작업공간이 필요한 예술가에게는 작업실, 전시장을 마련하기 위한 문화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1954년 '전 세계 빈민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베 피에르 신부가 룩셈부르크 라디오에서 '죽음에 직면해 있는 나의 친구들이여'라는 방송을 통해 불법적인 점거운동에 도덕적인 영감을 불어넣으면서 사회적 연대를 넓혀나갔다. 아베 피에르 신부는 "자식이 굶어죽는데 남아도는 빵 훔치는 게 당연하다. 그것이 도덕이다. … 비어있는 곳을 거주하기 위해 점거하는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불평등한 공간에 저항하고 불복종하는 예술가와 노숙인의 실천이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가능하게 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한 혁명가의 말을 기억하며, '권리'를 통한 '연대'를 확장시켜 가야할 때이다.

삼일아파트 안에서 바라본 세상

▲ 삼일아파트 안에서 바라본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