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학교이니만큼 노숙당사자들에게 주거권, 적절한 주거를 가질 권리라는 말이 얼마나 친근하게 다가갔는지가 궁금했다. <집퍼즐>, <집가게> 프로그램을 통해서 주거권의 의미는 풀었지만, ‘누구나 가진다’는 주거권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가질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특히나 거리와 열악한 주거 사이에서 진동하는 노숙당사자들에게 주거권이 누구나에게 보장된다는 말은 어쩌면 말뿐일 것이다.
권리를 안다고 문제가 바로 해결되진 않지만…
“제일 싼 집도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싼데, 집값은 갈수록 더 오르니 실제로 살 수나 있겠어?” <집가게> 프로그램에서 자신에게 맞는 집을 골라본 한 노숙인은 “서민들이 떳떳하게 집을 가질 수 있으려면 집값이 안정되어야지”라고 말했다. <우리는 어디로>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또 다른 노숙인은 “쪽방이나 고시원에 살다가도 다시 거리로 나가는 걸 보면 있는 사람은 더 가지고 없는 사람은 더 힘든 게 지금 세상”이라고 말했다.
주거인권학교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을 문제로 삼는 계기는 되었나 보다. <우리는 노숙인 인권지킴이> 프로그램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이 위법임을 알았다는 한 노숙인은 실제로 거부해봤는데 소용이 없더라고 말했다. “여러 명이 둘러싸고 보내주지를 않아. 어쩔 수 없이 신분증을 보여줬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지 거부가 안 통해. 헌법에 정해져 있지 않을 바에야….” 하지만 또 다른 노숙인은 “전에는 경찰을 보면 겁이 덜컥 났는데, 요즘은 어디 검문만 해보라고 벼르고 있는데도 검문을 안 하더라”며 힘주어 말했다. 주거인권학교는 권리주체들에게 '인권‘이라는 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관련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주거인권학교, 다음은 어디로?
그러면서도 간담회에서는 주거인권학교를 더 자주하자는 제안이 쏟아졌다. “처음 나왔는데 끝난다니 아쉽다. 좀 쉬었다가 또 하자.” 8번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준비를 해야 했던 준비팀 입장에서는 곧바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하기에는 벅차다. 하지만 주거인권학교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분위기는 무언가를 단지 배워서라기보다는 권리의 주체로 불리는 과정이 삶을 긍정하는 에너지가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주거인권학교 이후 활동에 대한 제안도 쏟아졌다.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뭣보다도 일자리가 생겨야 돈을 벌 수 있고 거리에서 자더라도 희망이 있지”라는 답이 나왔다. “방세가 비싸면 일자리 있어도 쓸모가 없지. 싸게 지낼 수 있는 방이 필요해”라는 말도 나왔다. 한 노숙인은 “서울시에서 하는 일자리갖기 프로젝트 하는 사람들도 길거리에서 자고 다음날 공사장으로 출근한다더라”고 전했다. 하나하나가 해결되기 힘든 문제지만 그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과정이 또 하나의 주거인권학교가 될 것이다. 물론 그 주체는 노숙당사자 그 자신일 테고.
주거인권학교 이후 참여했던 단체들이 공동사업을 지속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제안도 나왔다. “의견서 보내는 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고 계속 정부에 요구하고 해야 문제가 해결되지.” 지난 5월말 노숙당사자모임,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 인권운동사랑방은 <날아올라> 프로그램에서 나온 의견을 모아 서울시장선거에 나선 각 당 후보들에게 노숙인정책에 관해 질의한 바 있다. 또 노숙당사자모임은 보건복지부 장관, 언론과 경찰,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호소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노숙당사자들의 상황을 고려해 적극적인 활동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 노숙인은 “노숙인들이 집단이 못되는 것은 생계문제 때문”이라며 “당사자 운동을 하려는 사람이 있어도 생계는 책임질 테니 뜻을 펼쳐보라고 하는 사람이 없더라. 그게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회권운동의 새로운 길 찾기
그동안 사회권운동은 사회권의 내용을 소개하고 사회권도 인권임을 주장하는 이론화 작업에서부터 각종 실태조사와 연구 참여, 사회권 침해 당사자들과의 연대 등을 진행하면서 성장해왔다. 이런 활동들은 사회권운동이 자리잡기 위해 반드시 요청되는 과정이었으나 권리당사자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지는 사회권운동을 기획하기 위해서는 다른 활동방식이 요구되었다. 주거인권학교는 당사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당사자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주거공공성을 실현하는 구조를 모색해보자는 고민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런 점에서 주거인권학교는 당사자들에 대한 직접 지원이 아닌, 인권운동만의 고유한 역할을 통해 당사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활동의 전형을 창출했다. 인권교육의 원칙과 방법론을 접목시켜 권리의식의 제고를 통해 당사자 조직화와 당사자 운동을 지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또 현안 투쟁에만 집중하지 않으면서도 당사자들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은 이후 사회권운동이 다른 운동진영과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당사자들의 구체적인 경험이 사회권운동의 문제의식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애초 주거인권학교의 연속선상에서 고려했던 주거권침해 집단진정은 다른 단체들과의 연대 등이 적극적으로 만들어지지 못하면서 곧바로 진행하기는 어렵게 된 점은 아쉽다는 평가이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조직하다
주거권 취약계층이 처한 상황은 거대하고도 ‘일반적인’ 운동의제에 의해 가려지기 마련이다. 특히나 당사자 자신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주거인권학교는 주거권운동의 새로운 형식을 만드는 실험이 되기도 했다. 그동안의 주거권운동은 주로 철거에 반대하는 싸움을 중심으로 현안에 대응하는 성격이 강했다. 임대아파트나 비닐하우스촌을 중심으로 당사자조직을 위한 흐름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주거빈곤계층이 지금 닥친 문제에 대응하기에도 힘이 부쳤다. 이에 비해 장기적인 주민조직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강조해왔지만 실제로 조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풍부하지 않았다. 인권교육 프로그램을 주거권운동에 결합한 주거인권학교는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주민 조직화를 통해 주거권운동을 만들어간다는데 큰 의의를 둘 수 있겠다.
한편 주거인권학교를 준비한 사람들은 <우리는 노숙인 인권지킴이> 프로그램을 통해 인식한 경찰의 노숙인 인권침해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또 진행되었던 프로그램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주거인권학교 프로그램 자료집’을 만들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