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인권을 주장한다고 모두 인권이 될까? 전·의경들의 부모들이 시위대의 폭력 때문에 집회·시위 현장에서 인권침해를 당한다고 주장한다. 그 말은 맞는 것일까?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에 대해 경제계가 노사관계는 노사가 알아서 할 테니 국가인권위원회는 손떼라고 막말하고 나선다. 정말 국가인권위원회는 손을 떼야 옳은가? 노무현 대통령은 사회 양극화를 해소한다고 하면서 사회 양극화의 원인의 하나를 대기업 노조의 양보가 없기 때문이란다. 사회권의 확보가 중요한 일인데, 대통령의 진단은 정말 인권적일까?
집회·시위 현장에서 전·의경들은 국가권력의 위치에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나선다. 그 자리에서 전·의경은 국민의 위치에 있지 않다. 시위대의 폭력에 의해 그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더 나아가 전·의경에게 집회와 시위의 진압-집회와 시위를 진압한다거나 원천봉쇄한다는 것부터가 반인권적이다-을 할 수 있는 권한도 없는데 국가에 의해서 그렇게 동원된다. 문제는 잘못된 전·의경 제도와 집회시위를 진압할 수 있다는 국가의 정책,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정부가 민중들의 생존권을 억압하면서 그들을 국민의 대열에서 밀어내는 것에 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전·의경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이 또 걱정되는 것은 그렇다면 시위대의 폭력을 옹호하자는 것이냐는 생트집 잡기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경제계의 국가인권위원회 비난을 보자. 그들은 마치 기업 경영의 권리와 시장의 자유를 인권인 양 착각하고 있다. 우리 사회처럼 노동시장이 유연화된 곳이 없으며, 비정규직의 문제는 빈곤의 문제와 직결되는 상황이다.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말할 정도로 중차대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이익을 취한 것은 기업들-그것도 대기업, 재벌기업들이다. 그들은 국가의 폭력적인 노동탄압에 힘입고, 스스로의 노동탄압에 힘입어 오늘날의 부를 축적하였고, 이제는 국가도 두렵지 않은 경제권력을 구가하고 있다. 결국 노동자와 민중들의 희생 위에서 부를 축적한 마당에 이제 그 기득권을 지키자고 국가인권위원회에게 개입하지 말라고 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국가보안법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의 인정 등의 문제에 대해 반공주의적 잣대를 들이밀면서 국가인권위를 비난한다. 국가의 안보와 사회질서를 존중하라는 충고와 함께 말이다. 그렇지만 그 안보와 사회질서는 그들 자본가들의 안정적인 부의 축적과 재생산을 보장하는 기득권 질서를 깨지 말라는 '이권'에 취한 뱀의 요설일 뿐이다.
대통령의 시정연설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성장제일주의 신화에 사로잡힌 대통령은 진정 사회 양극화의 심각성을 모른다. OECD 국가 중에서 사회복지 예산 지출이 가장 낮은 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노동시장이 가장 유연화된 나라는? 우리나라다. 부의 집중현상이 미국보다 높게 나타난다는 통계도 있다. 그런데도 다시 노동자 타령이다. 물론 대기업 노조의 힘으로 일부 대기업의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사회 양극화의 문제는 분명히 잘못된 부의 분배구조의 문제가 아닌가. 돈을 너무 많이 쥐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그 돈을 내도록 하여 사회에 분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국제인권조약이나 우리 헌법의 조항들에서 이미 확인하듯이 자연자원과 부는 공공의 복리를 위하여 제한되고 적절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권이 추구하는 평등의 원리이다.
'인권'은 소중한 말이다. 근대사회 이후 인간으로 대접받지도 못했던 민중들이 끊임없이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을 벌인 결과다. 오늘의 인권이 있기까지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을 떠올리지 않고는 인권을 말할 수 없다. 슬그머니 인권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권의 요설에 더 이상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덧붙임
박래군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