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은 안돼
유엔헌장은 인권에 대해 다루면서 ‘인종, 성별, 언어 또는 종교’에 기반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세계인권선언 2조는 ‘인종, 피부색, 성별, 언어, 종교, 정치적 및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지위’라는 긴 목록에 걸쳐 차별을 금지한다. 또한 ‘법 앞에 평등’을 규정한 7조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확인하고 있다. 나아가 ‘세계인권선언을 위반하는 어떠한 차별’에 대하여도 ‘어떠한 차별의 선동’에 대하여도 반대한다고 밝히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차별금지 조항을 둘러싼 견해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만하면 됐다’와 ‘불충분하다. 더 세게 강조해야 한다’는 입장의 대립이었다. 강경입장은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권 국가들이었고, 소극적 입장은 영·미 쪽 자본주의 국가들이었다. 이 대립은 감정대립으로 치닫기도 했다.
소련 대표는 미국의 흑인차별, 남아공의 소수민인 인도인 차별, 여성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를 예로 들며 세계인권선언이 차별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국가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는 것으로 선언하길 바랐다. 이에 대한 반론은 개인의 권리를 주로 위협하는 것이 국가인데 국가 수중에 너무 많은 권력을 주려한다는 문제제기였다. 이에 대해 소련은 차별행위를 금지하려는 조항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흑인에게 린치(폭력적인 사적 제재)를 가하는 관행이 계속된다는 걸 의미한다고 응수했다. 바로 이때는 미국에서 흑인의 시민권 지위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가 설립되어 흑인에게 가해지는 각종 폭력에 대한 우려를 표현한 직후인지라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 대표인 엘리너 루즈벨트는 차별문제에 대한 강조를 회피하려 했다. 모든 ‘구별’이 나쁘거나 해로운 것은 아니라면서 ‘자의적’인 차별만 금지하자고 제안했다. 나아가 ‘차별’이란 단어보다는 ‘구별’이란 단어를 쓸 것을 주장했다.
자의적인 차별만 금지하자는 제안에 대해서 소련은 자의적인 차별만이 문제가 아니라 합법적으로 이뤄지는 일반적인 차별이 문제라며, 소위 자의적인 차별만을 비난하는 것은 법에 근거한 차별을 봐주고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국가의 대표들도 차별에는 악의적인 구별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자의적’이란 표현이 필요없다면서 소련의 의견을 지지했다. 결국 ‘자의적’ 이라는 표현은 삭제됐다. 또한 ‘차별’이란 단어가 아닌 ‘구별’이란 단어를 쓰는 것은 거기에 담긴 내용이 아예 바뀌는 걸 의미한다는 이유로 ‘차별’이란 단어가 유지됐다.
차별에 대한 언급을 줄이려는 또다른 제안은 2조의 차별금지규정과 7조의 ‘법 앞에 평등’을 합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소련은 명료한 차별금지 조항이 따로 있어야 하고 따라서 두개의 조항이 필요하다고 방어에 나섰다. 그런 주장을 하면서 예로 든 것은 미국의 흑인차별에 덧붙여 영국이 식민지들에서 자행하는 엄청난 차별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정치 영역에서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영국 의회의 640명 의원 중에 여성은 단지 24명이며, 미국 하원에서는 겨우 9명이라고 비판했다. 또 유럽과 아메리카의 30여 개국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소련의 비판에 대해 표적 공격을 한다는 비난이 있었고, 그렇게 말하는 소련은 왜 이동의 자유와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게 망명의 권리를 제한하는 차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느냐는 맞대응이 있었다.
어찌됐건 차별 조항의 강화를 이끌어낸 데는 소련의 완강함이 공헌을 했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특히 인정되는 것은 식민지에 대한 언급을 완강히 주장하고 관철시켰다는 점이다.
식민지를 어찌할까
2조 차별금지 조항의 후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삽입돼 있다.
“나아가 개인이 속한 나라나 영역이 독립국이든 신탁통치 지역이든, 비자치 지역이든 또는 그 밖의 다른 주권상의 제한을 받고 있는 지역이든, 그 나라나 영역의 정치적, 사법적, 국제적 지위를 근거로 차별이 행하여져서는 안된다”
이 부분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 어디에 살건 어떤 종류의 정치체제 하에 있건 차별받아선 안된다는 것이다.
연재를 시작할 때 말했지만, 인류의 절반 이상이 식민지에 살고 있던 때 그리고 식민체제에 지각변동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때에 선언은 탄생했다. 선언의 제정 논의는 1946년에 봄에 시작됐는데 1년 반이 지나 1947년 겨울이 될 때까지 식민지 문제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식민지 종주국들은 문제를 제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당연히 행동도 없었다.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진영의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후자는 식민지 민족들은 더 이상 옛날 방식으로 살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언을 식민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충돌이 이어졌다. 비자치 지역과 식민지에서 자국 정부에 대한 선거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식민지 종주국들은 서구의 민주주의 절차는 그런 지역의 전통과 문화에 적합하지 않으며 자신들은 그런 문제에 간섭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모든 사람”은 “자국의 통치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는 선언의 규정에서 “모든 사람”에 식민지 사람들이 포함되느냐를 놓고 이어진 충돌 끝에 채택된 표현은 직접적인 ‘식민지’라는 표현이 아니라 위에서 본 2조 후반부에 담긴 에두른 표현이었다.
‘식민지’라는 분명한 표현이 아니라 2조의 후반부에 은밀히 감춰진 것에는 식민지 종주국들의 반발 말고도 또다른 이유도 있다. 사실상 식민지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식민지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별도의 조항을 두는 것은 식민체제를 옹호하는 것과 같은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차별금지가 선언의 일반원칙이란 건 반복적으로 확인됐지만 그것이 식민지 영토들에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있을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식민지가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인류의 양심은 식민지 민족들에 대한 억압이 용인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됐다”는 인식이 용납한 것은 이 수준이었다. 또한 공산권의 당시 지도자였던 유고의 티토와 소련의 스탈린의 결별로 식민지 관련 조항을 둘러싼 공산권의 연대는 깨졌고 서로의 안을 불충분하다고 지적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표현을 희석하고 축소하려는 식민종주국의 노력이 성공하는 것을 돕게 됐다.
여성의 권리
유엔경제사회이사회는 유엔헌장의 남녀평등원칙에 근거하여 ‘여성지위에 관한 소위원회(여성소위)’를 구성하고 권고와 보고서를 인권위원회에 제출하도록 했다. 그런데 기구의 중복이 문제가 됐다. 여성소위의 의장은 여성은 타 위원회의 속도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경제사회이사회는 이를 용인했다. 그래서 여성소위는 인권위원회를 통하지 않고 경제사회이사회에 직접 보고하게 됐다.
정작 선언을 기초하는 인권위원회가 여성의 권리를 토의하게 되자 의장인 엘리너 루즈벨트는 두 기구 간에 중복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여성의 지위 문제를 다른 용어로 바꿔서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소련 대표는 “국제권리장전을 논의하게 됐을 때 인권위원회는 인권 영역 내에서 모든 문제를 다룰 권한이 있다”며 ‘여성의 지위’ 문제를 논의에서 삭제하는데 반대했다.
인권위원회는 여성소위와 접촉을 유지할 길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고 두 위원회는 따로 흘러갈 위험에 처하게 됐다. 그 결과 경제사회이사회는 특별 결의안을 채택해서 여성의 권리 문제가 고려될 때는 여성소위를 초대하여 투표 없이 참여하도록 할 것을 인권위원회에 요청하게 됐다. 인권위원회는 이에 따랐다.
선언의 대부분의 초안 문구는 “모든 사람”(all men)으로 시작됐다. 이에 대해 여성소위는 역사적으로 “모든”이란 말이 여성을 포함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엄숙하게 자유를 규정했지만 여성의 권리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여성을 포함하지도 않았으며, 세상은 그렇게 흘러왔다. 따라서 선언에서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사용될 때는 차별 없이 여성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선언 대부분의 조항은 그 시작이 “모든 사람”(all men)으로 시작되고 여기서의 사람(men)은 남성을 지칭해왔기에 많은 대표자들이 불만스러워했다. 역사적인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반영한다고 하면서 보다 분명하게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바꿀 것을 희망했다. 호주 대표는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했다. 남성인류(mankind)와 여성인류(womankind)가 아닌 인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엘리너 루즈벨트는 관습적으로 인류(mankind)는 남성과 여성을 차별 없이 의미하는 것 아니냐고 무마하려 했다.
여성소위는 남성의 뜻이 다분한 ‘men’이 아닌 성차별적 요소를 배제한 ‘human beings’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에 대한 영어 표현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곤란하다든가 이미 여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의미를 갖게 된 단어를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태도에 채택되지 않았다. “인류가족의 모든 구성원”, “모든 인민, 남성과 여성” 등의 제안 등이 오간 끝에 “모든 사람”(all human beings)이 채택됐다. 1조 이외의 모든 조항에서는 “모든 사람”(everyone)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성차별적 단어가 선언에는 남아있다. 선언을 통틀어 남성을 지칭하는 표현은 1조의 “형제애의 정신으로”(in a spirit of brotherhood)와 23조와 25조의 “(남성 노동자)자신과 가족”(himself and his family)이 있다. 23조와 25조의 문제는 남성의 소득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족 구성원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표적인 성별분업의 성차별적 사고의 예이다. 당시 주요 국가들의 헌법과 심지어 노동조합이 제출한 초고에서도 노동자와 그의 가족은 남성노동자와 그가 부양해야할 ‘그’의 가족으로 표현돼 있었다. 선언은 이들 표현 그대로를 반영했고, 여성소위는 그것을 방관했다. 이러한 간과는 선언을 기초한 당시 사람들의 진정한 태도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결혼과 무관하게” 평등한 시민권을 누릴 권리 부분은 누락됐다. ‘민법상 결혼은 선택의 자유, 아내의 존엄성, 일부일처, 결혼 해소에 대한 동등한 권리, 동등한 양육권, 자신의 국적을 유지할 권리, 계약을 맺을 권리, 재산을 가질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여성소위의 제안이었고 유급출산휴가, 교육에 대한 여성의 평등한 접근 등의 사회적 권고들도 있었다. 선언에서 결혼과 가정에 대한 조항 16조에는 이 중 일부만이 반영돼 있다.
결혼과 관련하여 주로 논쟁이 된 것은 여성의 권리라기보다는 타종교를 가진 사람과의 결혼이나 이혼에 관한 종교적 신념에 관한 것이었다. 타종교와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거나 종교적 이유로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해소될 수 없는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선언에 찬성표를 던진 배경은 이렇다. 종교와 국가는 분리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인권 문제가 논의돼야 하고, 이혼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국가들에서 관련 입법이 대개 여성에게 불리하다는 점이 지적됐고 그런 여성의 불리함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결혼의 성립이나 해소 시에 여/남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이혼을 독자적인 권리로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차별금지의 원칙에서 접근한 것이 선언기초자들의 의도였다.
16조에서는 “인종, 국적 또는 종교에 따른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고”란 차별금지 규정이 한 번 더 반복되는데 이에 대해 타 종교와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이 역시 이혼 문제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묵인됐다. 타종교와의 결혼 금지, 이혼 금지를 종교적 신념으로 가진 이슬람 또는 기독교나 결론적으로 선언에 찬성한 것은 인권문제가 종교적 근거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참정권, 노동권 등에서 여성의 권리를 특화하자는 주장은 모두 일반적인 표현으로 수렴됐다.
참정권에 대해 말하자면, 선언이 채택된 1948년 당시 아직도 많은 국가의 헌법들은 모든 사람들의 동등한 참정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권리 옹호자들은 정치적 미성숙을 이유로 참정권이 보류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참정권 앞에 ‘동등한’이란 말을 넣기 원했고, ‘재산, 거주지, 사회적 출신, 종교, 인종, 정치적 신념’ 등에 따른 차별 없이 공무에 취임할 권리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보통, 평등, 직접, 정기적, 자유로운, 공정한 비밀’ 선거란 일반적 표현으로 정리됐다. 노동권에 대해서도 남성과 동등한 혜택 속에 일해야 하고 동일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원칙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 대신에 여성을 특화시킨 표현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대 이유는 두 가지 입장이었다. ‘모든 사람’에 여성이 포함되는 걸 따로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특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또다른 반대 의견은 여성을 특화시키는 표현을 반복하는 것은 단지 여성의 지위를 약화시킬 뿐이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많은 영역에 걸쳐 있는데 특정 영역을 언급하는 것도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예 여성에 대한 특수한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선언의 모든 사람에 여성이 포함된다는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다. 결과적으로 선언은 앞서 지적한 부분(1조, 23조, 25조)의 표현을 빼고는 모두 ‘모든 사람’, ‘어떤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모든’ 등의 표현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세계인권선언에는 담지 못한 요소, 고의로 빼먹은 요소, 머뭇거리고 주저한 흔적들이 많다. 또한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모를 물음들도 많이 남아있다. 그렇다고 해서 ‘선언은 선언일 뿐’이라거나 ‘별 쓸데없다’란 말은 결코 할 수 없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쪽은 선언에 담긴 권리들이 아쉽지 않거나 의무를 회피하고 싶은 쪽일 것이다. 아쉽고 누락된 선까지 찾아 그리며 점선의 권리를 실선의 권리로 만들고자 하는 쪽에 선다면 선언을 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덧붙임
이번 기사를 마지막으로 [기획 - 세계인권선언 뜯어보기]은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