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다시 한 노동자가 스스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급히 병원에 후송되었고, 의식 불명인 상태라는 급보를 보았다. 지난 12일에는 경기도 고양시의 폭력적인 노점상 단속에 비관한 이근재 씨가 목을 매 죽었다. 지난 27일에는 건설노조 인천지부의 전기원 노동자 정해진 씨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또 죽었다.
다시금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려 하고 있다. 이미 죽어간 열사들의 죽음 위에 생존을 외치며 죽어야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악마에 짓눌린 이 사회의 현실이 다시 우리에게 닥치고 있다. 대선에 나선 각 당의 후보들이 각기 경제성장 목표치를 제시하고, 선진국의 부푼 꿈을 설파하고 다니는 이때, 자본과 잘 사는 이들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후보가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도탄에 빠진 민중들이 그의 뱀 같은 말에 현혹되어 혼미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삶의 벼랑 끝에 몰린 민중들은 죽음을 결심하고 있다. 죽어서라도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사람의 목숨을 이어 살아가려는 노력마저도 물거품이 되도록 만드는 절망의 세상을 향해 최후의 절규를 내지르고 그들은 죽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그들이 내건 주장이라는 게 기껏해야 생존권의 보장이다. 선진국 국민으로, 잘 짜인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자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상류층의 화려한 삶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다. 10년 넘게 붕어빵을 팔면서 근근이 이어오던 생계 수단마저 깨려는 그들의 폭력을 거두라는 요구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1만, 2만 볼트 고압 전기가 흐르는 전봇대를 타면서도 하도급 비정규직 노동자로 내몰린 그들이 노동조합 인정하고, 사용자들은 단체협상에 나서라는 요구다. 이런 요구들 때문에, 너무도 기본적인 이런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폭력으로 짓밟혀야 하는 현실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결행한 것이다.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 노동자, 늘어만 가는 빈민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생존권마저 박탈하면서 착취와 억압의 강도를 높이는 자본과 권력에 맞서 민중의 연대를 굳건히 하는 일 뿐이다. 뱀의 혓바닥을 가진 정치권 대선후보들의 허망한 공약을 쫓을 일이 아니다. 이미 판이 짜진 부르주아 정치판에서 투표 행위만으로 우리의 절박한 권리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다시 우리는 2003년 김주익 열사를 추모하던 김진숙 씨의 추모사를 경청해야 한다.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국경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하고, 여성과 남성으로 분할하고, 빈민과 노동자를 나누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자본과 권력의 분할전략을 거부하고, 계급과 계층, 지역과 국가를 넘어 강고하게 연대하는 길 뿐이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므로 깨”진다는 자각, 그로부터 굳건하게 형성되는 아래로부터의 연대의 전선으로 이 생존의 위기를 돌파해내야 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 야만의 질서를 깨고, 죽음의 행진을 멈추는 길이다. “참된 자유와 평등”을 내용으로 하는 인권을 우리 스스로 찾는 길이다. 인권을 쟁취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지금은 생존의 벼랑 끝에 몰려 어느 후미진 곳에서 죽음을 결심하고 유서를 쓸지도 모르는 민중들의 손을 잡아야 할 때다. 지금은 유서를 쓸 때가 아니라고, 지금은 굳건한 연대를 통해 민중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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