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번 호부터 [시설 밖으로, 세상을 향해] 연재가 시작됩니다. 이 꼭지의 기사는, “몸의 다름을 이유로 한 모든 차별에 반대하며, 구체적으로 탈시설을 지향”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기획·제공합니다. 4주마다 나들터에서 울려 퍼질 시설생활인들의 외침이 독자 여러분들과 만나 세상을 향한 더욱 큰 몸짓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설창조’
사람의 생김과 능력을 돈으로 사고팔게 되면서 몸의 다름에 ‘장애’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다름은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밀려나고, 다수의 비슷한 사람들은 서로의 몸을 기준으로 세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지요. 세상은 제법 그럴싸하게 만들어졌지만(만들어진 듯 보이지만), 결국 반쪽짜리 모습이 됩니다. 다름을 이유로 저만치 밀려나야 했던 사람들이 이 땅에 발붙이고 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리저리 가위질 된 세상에 설 자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밀려난 이들의 공간, ‘시설’이라는 또 다른 세상이 만들어집니다.
그곳에 사람이 있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들. 형제복지원, 소쩍새 마을, 구 에바다, 양지마을, 김포사랑의 집을 기억하시나요? 위의 시설에서 일어났던 문제들은 비슷한 패턴을 갖습니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 횡령, 폭력, 성폭력, 살인, 굶김, 감금, 강제노역들이지요. 듣기만 해도 끔찍한 이 단어들이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 년에도 수차례씩 언론에 쏟아져 나왔다면 혹 믿어지시나요?
반복의 이유가 뭘까. 한국에서 사회복지는 선의의 상징이고, 시설은 ‘성전의 영역’으로 인식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봉사를 하고, 후원을 하기도 하는 곳이죠.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시설문제가 터져 나올 때마다 “비단 그 곳에서만”, 혹은 “그 놈이 나빠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리라 자위합니다. 법(法)도 “사회적 공로”를 이유로 비리시설의 운영자를 처벌한 적 없으니 너그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시설의 문제를 자위와 너그러움으로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이유는 그 곳에 바로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통계로는 2만 명이지만 일각의 미신고 시설을 포함한다면 6만 명이 넘는 장애인의 삶이 이런 폭력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지요.
반란, 그리고 탈출
그렇다면 시설의 비리가 해결되면 시설의 문제는 해결될까요? 시설의 어쩔 수 없는 집단적 생활은 규칙을 만들고, 개인보다는 집단을 앞세워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철저히 억압합니다. 10명 중 7명의 시설생활인은 가족에 의해, 이웃에 의해, 누군가에 의해 시설에 강제로 입소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시설 입소를 자신이 선택했다 하더라도 이는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 혹은 경제적 상황 때문이라고 고백하지요. 대부분의 시설생활인은 ‘조건’만 된다면 시설에서 나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자유를 향한 갈망은 조건부가 아니기에, 이제 시설 안 사람들의 자유를 향한 작은 반란이 시작됩니다. 분리됐던 공간, 단절됐던 시간을 넘어, 누군가는 시설 문을 박차고 나오기도 하고, 누군가는 시설을 향해, 누군가는 시설에 가둔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몸을 움직입니다.
목소리 나누기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가치를 믿습니다. 어떠한 이유로도 사람이 사람 위에 있어서는 안 되고, 누구도 타인을 구속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시설에서 만나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곳에도 사람이 있다.”고 힘껏 외치지만 모기의 날갯짓보다도 작은 울림을 허공에 날려 보내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말입니다.
덧붙임
름달효정 님은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