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주>
2009년 7월 대한민국에서는 생존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물도 밥도 변소도 의약품도 의사도 협상도 막혔다. 뚫린 것이란 최루액과 테이저 건, 비처럼 쏟아 붇는 공포이다. ‘노동자의 인권’이란 단어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 스스로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노동권을 인권으로서 고찰한 연구 보고서를 요약, 소개한다. 이 보고서의 원문은 http://www.du.edu/gsis/hrhw/working/2006/36-adams-2006.pdf 에서 볼 수 있다.
도입
인권은 모든 사람이 단지 인간임으로서 해서 갖는 권리이고 본질상 보편적이다. 설령 인권이 억압되거나 방임될 수 있을지라도 국가 또는 비국가 행위자가 법적으로 인권을 부여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빼앗아갈 수도 없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표현에 따르면 인권은 모두가 모두에게 진 의무이다.
권리의 종류로서 노동권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두 개의 의미를 지닌다. 넓은 의미에서 노동권은 국제인권장전에 포괄된 노동자의 권리를 포함한다. 좁은 의미에서는 흔히 노동조합의 권리로 언급되며, 이것은 노동조건의 수립에서 집단적 목소리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에 집중한다.
집단적으로 조직하고 협상할 권리로서의 결사의 자유와 고용 영역에서의 결사의 자유의 명시는 현대의 세계적인 인권 체제의 수립보다 앞선 일이다. 지구적 관심사의 초점인 인권의 유산은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결사의 자유는 1944년 국제노동기구(ILO)의 필라델피아 선언에서 보편적 권리로 분명하게 인정돼 있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훗날의 세계인권선언에 영감과 지침을 제공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일부 국가에서 결사의 권리와 집단적으로 협상할 권리가 인권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정치 체제의 변화에 따라 확대되거나 줄어들 수 있는 제정법적 권리로 취급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고용 영역에 결사의 자유로 명시된 단체 협상의 인권적 성격
결사의 권리와 자신의 고용조건을 집단적으로 협상할 권리가 왜 인권으로 선포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의 정치경제적 제도의 발전을 고찰해야 한다.
노동권은 재산권과 밀접하게 얽혀있다. 18, 19세기 산업혁명 동안 자본을 공급하고 기업을 시작한 자본가 기업가가 생산과정의 최종 산물을 소유한다는 관례가 일반적으로 수립됐다. 이속에서 개별 노동자는 임금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거나 자본가에게 고용되는 노동계약 시스템이 존재하게 됐다. 관례적으로 기업가가 최종 산물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1800년경까지 일반적으로 인정된 바는 원자재를 보다 가치 있는 산물로 변형시키는 일차적 요소는 노동이라는 점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누군가가 나무로 시작하여 의자로 마쳤다면 나무의 가치가 증가된 것은 무엇보다도 최종 산물에 녹아든 노동 때문이다.
산업혁명 과정에 농민들의 땅에 머물 권리와 거기서 먹고 입으며 살만한 양의 산물을 받을 수 있는 봉건 규범은 깨졌다. 자유노동이란 스스로 하는 것이며, 그것의 유일한 의무란 임금 계약을 이행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개별 노동자의 협상력은 자본가의 그것에 비해 아주 열악하기 때문에 임금 협상은 흔히 빈곤과 불안의 상태로 귀결됐다.
이런 조건에서 터져 나온 것이 ‘노동운동’이었다. 노동운동은 19세기의 공통되고 점증하는 현상이었다. 이 운동의 지배적인 흐름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개의 주요 목적을 가졌다. 정치 영역에서의 민주주의는 피지배자에게 선출되는 정부와 피지배자에게 책임지는 정부를 의미하게 됐다. 사회주의는 사회의 생산역량을 자본가를 위한 이윤 생산의 장치가 아니라 인민의 이름으로 국가가 소유하고 만인의 이익이 되도록 운영하는 것이었다.
서유럽에서는 노동과 자본 간의 국가적 타협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작동했다. 이런 타협의 가장 공통된 형태는 노동측이 자본 측의 생산을 조직하고 주도할 권리, 소유권과 이윤을 취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자본 측은 노동자의 결사의 권리, 노동자 스스로가 선택한 대표자를 통해 계약 사항을 집단적으로 협상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경제적 및 사회적 정책에 대해 자본과 국가와 함께 결정할 권리의 인정이었다. 노동과 자본은 사회적 동반자가 될 것이라 말하게 됐다.
ILO의 지도를 통해 유사한 지구적 타협이 발생했다. 노동, 기업, 정부 대표자들이 ILO 연례 노동 회의에서 결사의 자유와 단체협상 협약에 합의하게 됐다. 그 후로 이들 협약에 담긴 원칙은 거의 모든 국가에 의해 인준됐고 ILO는 적극적으로 이를 증진했다. ILO 기준에 따르면 노동은 조직할 권리, 노동의 조건을 집단적으로 협상할 권리, 경제사회정책의 결정과 운영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이들 기준이 완전히 존중된다 할지라도 노동자에게 인권을 제공하는지는 여전히 문제이다. 적어도 두 개의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조직하고 집단적으로 협상할 권리는 조직과 단체협상을 안 할 권리도 포함하는 것으로 흔히 해석되고 따라서 집합적 대표성의 부재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둘째, 생산을 조직하고 지도하며 생산과정의 결과를 소유할 자본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협약은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노동자의 권리가 완전히 존중되려면 단체협상을 넘어서 경제적 기업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로 나아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첫 번째 부류의 해석은 잘못됐다고 본다. 단체 협상은 노동조합주의와 긴밀하게 결합돼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권리가 단체 협상을 안 할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결론짓기 쉽다. 하지만 인권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면 두 권리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다수의 유럽 국가들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단체협약에 의해 포괄되는 상황이지만 큰 비율의 사람들이 노동조합원이 아니다. 공통적으로 협상권을 부여받은 노동조합들은 관련 협상 상황에서 ‘가장 대표성’있는 것으로 지명된 노조들이다. 결사에 참여할 권리 또는 하지 않을 권리는 자유를 강화하는 반면에, 단체협약을 자제할 권리는 자유, 민주주의, 인간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작업장에서의 노동자 대표성이 없는 기업에서는 고용주는 명령하고 노동자는 해고의 고통 때문에 그것들을 실행해야 한다. 복종을 위해 고용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 노동자에게서 일종의 자율성 또는 책임성을 빼앗는다. 노동자는 고용주에게 복종할 것이 요구되는 고용주의 도구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자의 상황은 자유의 심각한 축소로 나타난다. 요약하면 고용주는 자율성, 책임, 자유 없이 지내겠다는 약속을 노동자에게 받아내는 것이고, 이런 자질 없이 존엄성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유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공통된 반응은 노동조건이 단지 강요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고용주가 개별적으로 협상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전형적인 노동자의 협상력이 고용주의 그것에 비해 아주 열악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결과는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의 양자택일’일 뿐이다. 또한 어떤 규모의 기업에서든지 임금지불시스템 등 광범위한 노동조건은 집단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지 개별 협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혹자는 이런 힘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가치란 노동자가 그런 제안을 수락하는데 있어 자유롭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인권에 대한 존중이 외관상의 자유가 축소되는 걸 필요로 한다. 가령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노예로 팔수는 없다. 왜냐하면 노예의 조건은 인간의 기본적인 인간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고용과 자발적인 노예간의 유사성은 강력하다. 두 시스템 모두에서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인권에 상반되는 조건에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타인의 통제 하에 둔다. 결과적으로 19세기의 노동권 옹호자들은 일방적인 고용주 통제하의 고용을 일컬어 ‘임금 노예제’라 했고, 그런 지위에 강제로 들어가든 자발적으로 들어가든 간에 노예제에 대한 반대처럼 윤리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지위로 봤다. 노예는 그럴 수 없는 반면에 고용 상태에서는 개인이 계약을 자유롭게 철회할 수 있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안적인 고용기회라는 것이 자신을 또 다른 자본가의 일방적 통제 하에 두는 것밖에 없는 경제 체제에서 둘 사이의 차이성은 구조적으로 사라진다. 계약이 자유이고 자발적이냐와 무관하게 ‘X가 Y의 도구가 될 것에 동의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틀렸다’.
국제체제에서 ILO는 결사의 권리와 단체협상의 권리의 구체적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한 기구로서 지명돼왔다. 특히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다음을 포괄하는 권리를 수립했다.
1. 노동자의 조직을 결성하거나 가입할 권리
2. 스스로 선택한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
3. 노동자 조직이 스스로의 프로그램을 개발할 권리
4. 노동자 조직을 통하여 고용주에게 집단적 항의를 할 권리
5.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의 조직을 인정하고 단체협약에 도달할 목적으로 선의로 협상할 고용주의 의무
6. 교착상태의 경우 노동자의 파업권
ILO 원칙과 규범에 따르면 국가는 가능한 최대수의 노동자가 이런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표를 갖고 이런 개념의 단체협상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적극적인 책임을 진다. 또한 국가는 상호관심사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목적으로 경제사회정책에 관해 노동자 조직 및 고용주 조직과 협의할 적극적인 책임을 진다.
국제인권규범에 대한 준수 이끌기
국제인권장전에 규정된 권리 중에 노동자의 권리로 간주될 수 있는 권리의 범주는 아주 넓다. ILO의 1998년 ‘인권으로서의 노동에서의 기본원칙과 권리선언’에 규정된 다섯 개의 ‘핵심적인 노동권’은 인권장전에서 언급된 것들이다. 다섯 개의 핵심 권리란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아동노동․노예제․기타 형태의 강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소극적 권리)와 결사의 자유의 권리, 조직할 권리, 단체협상을 할 권리(적극적 권리)이다. 국제인권장전에 규정된 추가적 권리는 공정한 임금과 존엄한 생활을 제공하는 임금에 대한 권리,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조건에 대한 권리, 유급휴가의 권리, 합리적인 노동시간에 대한 권리,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임산부 유급휴가의 권리, 파업권이다.
적절한 상황에서 노동권으로 간주될 수 있는 또 다른 권리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또는 처벌로부터의 자유,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되지 않을 자유이다. 이들 권리는 강제노동이나 아동노동과 결합돼 흔히 위반된다. 평화적 집회의 권리는 파업권과 긴밀히 연관된다.
앞서 말했듯이 국제노동기준의 준수를 증진하는 주요기관은 ILO다. 핵심 노동권에 대한 1998년 ILO의 선언은 1995년 유엔사회개발정상회의의 결과이다. 정상회의는 핵심노동권의 인권적 성격을 선포하고 그에 대한 준수를 촉진할 것을 ILO에 촉구했다. 1996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생겼고 노동권 옹호자들은 회원 자격으로서 국제노동기준의 준수를 포함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조항’을 포함할 것을 촉구했다. WTO는 핵심 노동권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이 문제를 ILO에 위탁했다. 골칫거리는 기업을 규제하는 문제이다. 글로벌 컴팩트(Global Compact) 등 여러 지침은 ‘자발성’을 요구할 뿐이다. 최근 몇 년간 보다 강제적인 규제를 향한 움직임이 있으면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은 아동노동, 강제노동, 고용 평등을 서둘러 기구의 결정에 포함시켰지만 노동조합의 권리를 수용하는 데는 느리게 움직였다. 한편 민간단체들은 기업들의 ‘자발적’ 선언에 만족하지 않고 외부의 조사자들이 기업의 관행을 조사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공개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 결과 국제노동기준에 기반한 규범 형성을 과제로 삼거나 기업행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토록 하거나 투자 결정에 국제노동기준의 준수를 반영토록 하는 등의 일을 과제로 삼는 독립 기구들이 급성장했다. 이런 실험들이 지난 이십 여 년 간 상당히 있었지만 이런 노력의 영향을 평가하는 기술은 아직 개발 단계이다.
국제적 차원에서 노동과 인권문제 전문가들은 핵심 노동권이 기본적 인권이란 것에 대한 강력한 합의에 도달했다. 또한 핵심 노동권의 인권적 성격은 철학적으로나 종교이론에서나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다. 국가만이 아니라 개인과 기업, 사회의 여타 단위는 이들 권리를 준수하기 위해 도덕적 및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의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