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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도의 인권이야기] 2013년 11월 13일, 노조 할 권리

정규직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통용’되었을까? 사실 이 말이 사회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등장해서부터다. IMF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변형근로제라는 ‘3제’가 도입되었는데, 이때부터 우리사회에는 이제까지 상식과는 다른, 고용이 불안하고, 노동3권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을 수 없는 노동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등장했다. 바로 비정규직인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고용형태로 귀결되는, 무언가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들… 해고가 자유롭고, 그에 따라 임금 삭감도 자유롭고, 사내 복지 혜택도 줄어가는… 그런 노동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매우 충격적이었는데, 왜냐하면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노동자의 전형은 고용이 정년까지 보장되고, 임금도 안정적으로 오르고, 사내 복지도 일정하게 누릴 수 있는, 그런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떤 것…, 이걸 그제야 사람들은 정규직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이 같은 정규직은 언제부터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고용형태로 안착되기 시작했을까? 부당해고를 금지하는 근로기준법을 제정한 때부터? 아니다. 1987년 ‘인간다운 삶’을 요구한 노동자대투쟁 이후부터였다. 1988년 ‘노동악법 철폐’를 요구한 노동법 개정투쟁 이후에야 세상이 정규직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고용이 안정된 노동자라는 것은, 군인, 공무원, 교사 등 체제유지와 재생산을 위해 동원된 몇몇 소수 ‘국민’에 한정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전노협과 민주노총의 기나긴 투쟁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시민들의 상식을 바꾸어 놓았다. 모든 노동자가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따라서 역사적인 맥락에서 정규직이란 ‘노조 할 권리’를 쟁취한 노동자고, 여차하면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노동자고, 노동조합을 결성한 노동자다.

1987년 7월, 8월, 9월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하루 8시간 노동 생활임금 보장’, ‘인간다운 대우―고용안정, 사내복지 확대’를 요구했다. 정권과 자본가들은 이들을 빨갱이라 욕했고, 모질게 탄압했으며 ‘제3자 개입금지’, ‘동일 사업장 내 복수노조 금지’ 조항 등을 활용해 노동조합결성을 방해하였다. 정권은 법정최저임금 인상정도로 만족할 것을 주문했지만, 노동자들은 결코 주저함이 없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요구했고, 노동3권 보장을 요구했다.

노동3권 보장…, “인간답게 살고 싶다! 노동3권 보장하라! 한다고 누가 보장해 줍니까? 야당이 노동3권 보장하지 못해요.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힘을 가지고 있으면, 보장해 달라고 부르짖지 않아도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짜 위대한 노동자인 것입니다.” 1988년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가 목 놓아 외친 연설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혈서로 쓴 “노동해방” 플랭카드를 앞세워 여의도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무언가 더 근본적인 개선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분노는 노동법을 향했다. 법과 제도를 바꿀 것을 요구했다. “제3자 개입금지 삭제하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보장하라!” “노조설립제한 폐지하라!” “노동악법 철폐하라!” “군부독재 타도하자” “전두환 이순자를 구속하자” “전경련을 해체하라” 1988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노동자들은 그렇게 요구했다. 그 힘으로 전노협을 건설하고, 그 힘으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바꿔나갔다. 정규직이라는 지배적 형상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모두가 임금을 함께 올리고(연대임금), 모두가 안정된 고용을 누릴 수 있는(연대고용) 방법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집단적으로 요구하고 쟁취하는 것뿐이다. 헌법에 노동3권―‘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이 명시된 이유도, 노동자들이 ‘노조 할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우를 개선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52시간 넘는 장시간 근로를 규제한다.’ 노조 할 권리가 없으면 이 규제도 엉뚱하게 작동한다. 사용주들은 잔꾀를 부려 52시간 초과분의 연장근로수당을 기타수당으로 둔갑시켜 지급하고는 법망을 피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변형근로제를 도입해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하고, 더불어 임금도 삭감시킨다. ‘근로계약서를 서면 교부한다.’ 노조 할 권리가 없으면 이것도 마찬가지다. 고용노동부가 주관하는 근로계약서 서면 교부 캠페인은 계약직 근로를 확산시킨다. 고용노동부의 표준근로계약서에는 근로계약기간을 명시하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휴수당 지급’, ‘휴업수당 지급’, ‘부당해고 금지’, ‘연차 휴가 보장’ …, 노조 할 권리가 없으면 이 조항들은 대부분 공문구로 그치고 만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정당을 구성하거나 자신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조차도 모두…, 노조 할 권리가 없으면 허사가 되고 만다.

최저임금을 벗어나지 못하는 저임금, 관리자의 엄격한 생산 통제와 높은 노동 강도, 그리고 장시간 노동…, 이것이 오늘날 공단의 모습이다. 이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바꿔내려면, ‘노조 할 권리’가 필요하다. 이 권리를 노동자들이 스스로 쟁취할 수 없다면, 공단을 바꿔내려는 어떤 노력도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지난 10여 년 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라는 것도 사실, 우리에게도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 아니었던가? ‘노조 할 권리’를 계속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아닌가? 그 권리를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에 정규직 노동자들도 불리한 단체협약안을 받아들이고 정리해고를 묵인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있는 것 아닌가? 노동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이 같은 지배적 형상으로 바꿔놓으려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사회 노동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노조 할 권리’다.
덧붙임

박준도 님은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운동연구소 기획실장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