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죽은 지 딱 100년이 된 날이었다. 그날 난 깜짝 놀랐다. 한국사회가 이토록 독립운동가를 존경하고 사모했었나 싶어서 말이다. 위에 인용문은 내가 안중근보다 훨씬 더 좋아하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말이다. 조국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중국혁명에 뛰어들었던 장지락이란 이름의 조선인. 마침내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비밀리에 처형된 뒤 40여 년이 지나서야 중국에서 공산당원 자격이 회복되었던 그이의 삶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통해 김산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만약 김산이 작가였다면 아마도 조지 오웰과 같은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김산이 죽었던 1938년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출판된 해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빅 브라더’를 만들어낸『1984년』의 작가, 스탈린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반공소설’의 대명사가 된『동물농장』의 작가인 조지 오웰은 아이러니하게도 꽤나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이며 여러 편의 르포르타주를 남긴 르포작가이다. 몰락한 부르주아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그는 영국의 명문으로 알려진 이튼스쿨을 졸업하자마자 열아홉 살의 나이로 경찰시험을 보고 버마로 가서 5년 동안 경찰 노릇을 했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제국의 말단 관리로서 느껴야 했던 자괴감은 결국 그를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말이 좋아 전업 작가이지 이십대 후반의 빈털터리였던 그는 2년여 동안 파리의 쪽방 촌과 런던의 부랑자 시설을 전전하며 뜨내기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그의 첫 르포작품이자 조지 오웰이란 필명을 최초로 사용했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탄생한다. 언뜻 보면 치기어린 젊은이의 방랑기이자 체험기처럼 보이지만 도시 빈민층의 생활에 대한 치밀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지금의 한국과도 별반 다르지 않는 빈곤정책에 대한 통렬한 비판, 자선이 갖는 위선에 대한 통찰은 그를 주목할 만한 신예작가로 만들었다.
이 작품을 읽고 그를 눈 여겨 보았던 진보적인 독서모임 ‘레프트 북클럽’의 편집자는 그에게 영국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하여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한다. 두 달에 걸쳐 위건, 리버플, 반즐리 등 탄광지대를 돌며 탄광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주택문제와 실업의 문제 등을 조사하고 쓴 르포르타주가 바로 올해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온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오웰은 책의 절반을 할애하여 자신을 비롯한 부르주아 지식인에게 얼마나 뿌리 깊은 속물근성이 있는지(“궁극적으로 속물근성을 떨쳐버려야겠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떨쳐버린 척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이른바 사회주의자를 자임하는 이들이 왜 대중들에게 그토록 외면당하는지(“기독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홍보에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은 바로 그 신봉자들인 것이다.”)를 조목조목 꼬집으며 그로 인해 사회주의자들이 도리어 파시즘을 도와주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지적은 오웰에게 집필을 맡겼던 ‘레프트 북클럽’ 편집자를 매우 당혹스럽게 했고, 책은 출간과 동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정작 오웰은 이 책이 나오기도 전에 파시즘과 맞서 싸우러 스페인으로 달려갔다.
오로지 진실의 힘을 갖고 전장으로 달려가다
스페인 내전은 반파시즘 진영인 좌파 인민전선(공화파) 정부와 가톨릭교회와 파시스트의 지원을 받았던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 간의 전쟁이었지만 그 실상은 좀 더 복잡했다.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자 민주주의를 위해 나섰던 것은 노동자들, 빈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였으며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스탈린주의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한 편이 되어 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카탈로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혁명의 기운이 높아지자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했던 우파 자유주의 진영과 역시 혁명을 원치 않았던 소련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스페인 공산당은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편입시키려 하고 마침내 양 측 간에 무력충돌까지 빚어진다. 그 가운데 많은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은 ‘트로츠키주의자’, ‘프랑코의 내부첩자’로 지목되고 경찰이 동원돼 색출작업이 벌어진다.
카탈로니아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아무도 아첨하거나 팁을 받지 않았고 웨이터와 구두닦이가 손님을 똑바로 보며 ‘동지’라고 부르는” 사회분위기에 감동받고 “공동의 품위를 위해” 민병대에 들어갔던 오웰은 애초부터 공산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내전을 승리한 뒤 혁명을 할 것이냐, 내전과 혁명을 동시에 할 것이냐 하는 정치적인 논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총도 없이 전선에 배치되었던 그에게는 더 나은 무기가 언제 보급될 지가 관심사였고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의 등을 툭툭 치며 담배를 달라고 하고 싶으면 그럴 수도 있”는 평등하면서도 “어느 누구보다 더 믿음직한 군대”가 언제 파시스트와 제대로 싸울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와 공산당의 배신이 무력충돌로 이어지자 더 이상 방관자로 남을 수 없게 된다. “나는 부르주아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이상화된 ‘노동자’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피와 살을 가진 진짜 노동자들이 그들의 천적인 경찰과 충돌하는 광경을 보니 내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나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 결국 오웰 또한 프랑코의 첩자인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리면서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가까스로 스페인을 탈출하는 것으로 『카탈로니아 찬가』는 끝을 맺는다.
이 세 편의 르포르타주가 씌어진 1930년대는 어떠한 시대였나? 1929년 미국 증시의 폭락으로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극심한 경제난에 봉착했다. 공장마다 실업자가 속출했고 도시마다 부랑인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기계화, 산업화, 생산성 증대만이 진보라며 절대시되었고 우생학은 과학으로 포장되어 나치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도 정신장애인, 알코올 중독자, 장애인을 강제로 불임시키는 법들이 만들어지는 등 국가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가 공공연히 자행되던 때였다. 그 가운데 조지 오웰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혁명과 전쟁은 패배했다. 인류는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파시즘에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미래를 낙관할 수 없었고 『1984년』을 쓴 다음해인 1950년 오웰은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의식, 곧 불의(不義)에 대한 의식이다. 책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자, 지금부터 나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라는 산문의 한 대목이다. 스페인 내전이 아니라 내전 속 또 하나의 내전에 대한 르포르타주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그는 냉소와 환멸을 느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인간의 고상함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사실 카탈로니아는 평택 대추리, 서울 용산, 제주 강정마을에도 있었던 것 아닐까? 도처에 있는 카탈로니아를 위해 더 많은 오웰, 더 많은 르포르타주가 필요하다.
덧붙임
강곤 님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편집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