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읽는다면 개발지역이 선포되고, 그 지역에 살던 주민들이 떠나면서 끝나는 익숙한 줄거리다. “나만 아니면, 우리 가족만 아니면 돼!” 하는 무관심은 어느 새 전국철거민연합과 같은 조직을 제외하고는 시민단체도, 지식인도, 일상에서의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뼈 속까지 전염된 것이다. 이처럼 약삭빠른 무관심과 익숙함에 안주했으면서도 두리반 사태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농성이 시작되면서, 다른 철거 갈등 사례들과는 달리 홍대 인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두리반에 들어와 연대를 맺고, 언론을 통해서 “제2의 용산”이라는 표어가 붙으면서부터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두리반을 지켜내고 있는 사람들의 노력은 철거문제를 다시 의제화 하고 희망의 실마리를 찾는 과정에 놓여있다. 도시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the city) 개념은 그러한 대안의 하나로 검토해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화 된 공간정책에 대항한 도시에 대한 권리
도시에 대한 권리는 프랑스 68혁명 당시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제창한 개념으로 최근 저명한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다시 이 개념에 주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하비에 따르면, 도시에 대한 권리는 도시공간에서 잉여의 생산과 활용에 대한 도시민들의 접근권이다. 도시민 스스로 도시를 변화시키는 권리로서 단순히 개인의 권리이기 보다는 도시공간을 재구성하기 위한 집합적 권리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그는 신자유주의화 된 공간정책에 맞서 각 도시의 투쟁들을 통합하기 위한 정치적 이상으로 ‘도시에 대한 권리’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대국가가 성립되고서 국가 수준에서 인권이 발전해온 상황에서 갑자기 왜 국가 수준이 아닌 도시 수준에 주목하라는 걸까?
1990년대부터 심화된 세계화는 기존의 국가가 맡고 있었던 공공 서비스를 민간에 이양하고, 초국적 기업으로 대표되는 자본의 역량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 오일쇼크 등의 경제위기로 재정이 악화되면서 중앙정부와 도시정부들은 기존의 안정적인 운영보다는 성장을 지향하는 기업가주의 ‘경영’으로 전환한다. 도시정부는 해외자본과 기업을 유치하기 위하여 이전 보다 과감한 메가 프로젝트를 도심에서 추진하고, 이 과정에서 서민들은 주변화 되고, 사회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 서울 또한 해외자본, 기업과 더불어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상당한 ‘공간 재구조화’를 겪게 되었다. 그 예로 동대문운동장이 허물어지고, 그 곳에서 영업을 하던 노점 상인들은 쫓겨났으며, 대신에 휘황찬란한 디자인플라자와 공원이 들어섰다. 따라서 국가 수준에서 합의되고 발전되어온 인권으로는 도시 수준에서 새로운 인권의 위기를 적절하게 대응하는데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앙정부로부터의 제반 권능을 도시정부로 이양되면서 국가 수준의 인권의 효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인권도 도시 수준에서의 재조정이 필요해진 것이다.
조례 제정을 통해 제도화 모색
도시에 대한 권리를 어느 선까지 보장하는 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도시정부들마다 상이하다. 하지만 도시정부들 간의 논의가 진행 중에 있으며, 그 결실로 <도시 인권에 대한 유럽헌장>, <도시의 인권을 위한 지구 헌장> 등이 역동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2001년 브라질에서는 도시에 대한 권리가 담긴 도시법(City Statute)이 통과되었다. 도시에 대한 권리를 제도화 하는 것은 국회에서 법안을 처리하는 속도보다 상대적으로 빠른 시의회의 조례 제정을 통해서 시도되고 있다.
두리반이 있는 구역의 건설시행사인 GS건설은 한국전력을 압박하여 전기 공급마저 끊어놓는 비인간적이고, 치사한 행위를 저질렀다. 두리반에 전기 공급을 차단한 사건은 공공서비스 부문에서 국가 역할의 약화가 도시 공간에서 자본의 노골적인 힘으로 표출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두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도시의 인권을 위한 지구 헌장>과 <도시에 대한 권리에 관한 세계헌장>에서는 “도시는 모든 거주자들에게 에너지, 물, 위생 등에 대해 적절한 양과 질의 서비스를 보장해야 하며, 그들의 재력 혹은 그 사용자의 지리적인 위치와 관련 없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자본과 국가는 지구단위계획이라는 교묘한 불도저를 앞세우고, 돈 없는 서민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이 약화되는 마당에 지방정부 단위에서 제도적으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틀을 만드는 것은 중요할 수 있다. 물론 조례만 만든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두리반 사태를 포함한 여러 철거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권리쟁취의 역사가 그러하듯 세상에 공짜는 없다! 투쟁을 통하여 얻어진 권리들이 누적될수록 제2, 제3의 두리반과 용산참사가 재발될 확률도 줄지 않을까? 아직 도시에 대한 권리는 해외에서도 여전히 논쟁과 연구 중에 있고, 정책 도입을 검토 중에 있다. 국내에서는 용산참사를 계기로 올해 초부터 필자도 참여하는 ‘도시와 인권 세미나’가 중심이 되어 한국 사회에서 도시에 대한 권리를 이식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개발을 모색 중에 있다.
현재 두리반 식당은 예술가들이 들어와서 용역들의 침입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정기적인 공연을 하면서 다채로운 연대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하루빨리 예정된 공연은 취소되고, 식당으로 돌아와 아직 먹어보지 못한 두리반 칼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먹고 싶다. 어느덧 따뜻한 칼국수 국물이 그리워지는 겨울이 오고 있다. 두리반을 지키는 주인 내외와 예술가들에게 혹한의 겨울을 맞지 않길 기원한다.
덧붙임
황진태 님은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객원연구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