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어린 사람이 제일 기쁨을 얻느냐. 어린 사람이 제 마음껏 꿈, 즉 어릴 수 있는 때, 즉 소호의 방해가 없이 자유로 활동할 수 있는 그때에 제일 기뻐하는 것이니 그것은 꿈즈럭 어린다(活動)는 그것뿐만이 그들의 생명이요 생활의 전부인 까닭이다.
가만히 주의해 보라. 갓난아기로부터 십 오륙까지의 사람이 잠자는 때를 빼고는 한시반시라도 꿈즉어리지 않은 때가 있는가. 꿈즈럭 어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자살을 하라는 말이다. 그들은 부즈런히 꿈즉어려야 부즈런히 크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부모는 어린 사람의 꿈즉어림을 작란이라고만 알고 작란말아, 좀 얌전하라고 꾸짖어왔다.“
- 방정환, 「아동문제 강연자료」, 『학생』, 1930년 7월호
방정환은 어린이가 자유의지에 기반하여 즐거움을 찾고자 한 행동을 이해하려 했고, 그것을 다른 어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린이의 즐거움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어린이가 조용히 있기만을 바라고 혼쭐만 낼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알아가는 기쁨 속에 온몸을 던지는 어린이가 자기 본성을 억누르지 않고 ‘꼼지락대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가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 가장 큰 이유는 어린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함이 있었다.
어린이책 역사가 이룬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는 이렇게 어린이의 마음과 입장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표현하고자 한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여전히 계몽적인 이야기가 넘치지만, 어린이가 가진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중요한 말로 여기고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소중하고도 재미있는 작품들이 있어 몇 편 소개할까 한다.
고미 타로, 『네 맘은 그래도… 엄마는 이런 게 좋아』 『엄마 맘은 그래도… 난 이런 게 좋아』
“자신의 귀로 질문을 듣고, 자신의 코로 냄새를 맡으며, 자신의 머리로 생각한 것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 고미 타로, 『어른들은/이/의 문제야』
고미 타로는 어른들이 가진 편견, 공포, 불안이 어린이들의 세계를 좁은 곳에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어른들은/이/의 문제야』를 통해 일본 사회가 어린이들에게 의무와 복종을 강요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조금씩 배워갈 기회를 차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미 타로는 좁은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분방한 그림책을 다수 그렸는데, 그의 이런 사상이 밑바탕에 있었다는 것에 조금 더 흥미를 갖고 살피게 됐다. 그렇게 해서 찾은 책이 『네 맘은 그래도… 엄마는 이런 게 좋아』와 『엄마는 그래…도 난 이런 게 좋아』다.
이 두 개의 그림책은 엄마와 아이가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얼마나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첫 번째 책, 『네 맘은 그래도… 엄마는 이런 게 좋아』는 제목 그대로 엄마의 입장을 대변한다. 엄마가 좋아하는 어린이는 물론 착한 어린이다. 구석구석 꼼꼼히 청소할 때 옆에 살짝 비켜있는 아이, 장난감도 정리하며 노는 아이, 생명을 존중하며 엄마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아이, 깔끔한 아이, 엄마가 없어도 당황하지 않고 집을 어지럽히지 않고 잘 노는 아이, 다도를 즐길 줄 아는 아이다.
하지만 어린이 마음은 다르다. 그것을 대변하는 책이 『엄마는 그래도… 난 이런 게 좋아』다. 벽이 도화지가 되고 주방 기구가 음악 기구가 되어 세상을 즐겁게 둥둥 울리기를 바라는 아이, 장난감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노는 아이, 가끔 상자 속에 숨고 싶은 아이, 소파에 거꾸로 매달려 누워 있고 싶은 아이가 있다.
엄마가 바라는 것이 정리정돈을 잘하고 단정하고 착한 아이라면, 아이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환영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두 작품에는 그 어떤 코멘트가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비교하여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른들의 눈치를 보는 게 생활의 전부가 되어 정말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 고미 타로, 『어른들은/이/의 문제야』
어린이들이 꼼지락거리고 장난치며 세상을 알아가는 기쁨을 막는다는 것은 단지 어린이 행동을 멈추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어른들이 정해놓은 세상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자기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 규칙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굴종하고 눈치 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익살맞은 그림책을 통해 어린이가 가진 입장이 어른들이 가진 입장을 강조하는 만큼 받아들여지고 존중받아야 함을 보여주고 것이 유쾌하고 반가웠다.
아이가 네 살 때, 나에게 흰 도화지를 벽에 붙여달라고 한 일이 있다. 나는 앞의 그림책에 있는 엄마처럼 아이가 크레파스를 들고 멋진 화가처럼 그림 솜씨를 뽐낼 것이라 기대했고 기뻤다. 벽에 도화지를 붙여준 뒤 여러 기대를 하고 다른 일을 보다 돌아와 보니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나 있었다. 아이는 흰 도화지만 빼고 그 바깥의 벽면에 자기가 좋아하는 글자와 그림을 그려 놓았던 것이다. 나는 아이가 흰 도화지 속에 그릴 것을 상상했지만, 아이는 흰 도화지 바깥을 상상했던 것이다. 나는 이 일화를 통해 아이가 가진 기준과 내가 가진 기준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졌는지를 느꼈다. 벽은 지저분해졌지만, 서로가 가진 기준과 질서의 차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할까. 아이가 바라는 것과 의도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고 대화하지 않으면 도화지의 안과 밖만큼 큰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어른이 가진 기준만 강요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얻었다. 그 차이를 섬세하고도 익살맞게 보여주고 있는 고미 타로의 그림책이 반갑게 느껴졌다. 어른과 아이 모두 서로가 가진 차이를 드러내어 놓는 것에 익숙해지면 세상은 좀 더 재미있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고미 타로 그림책이 가진 유쾌함의 힘이겠다.
덧붙임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