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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유혹] 긍정주의는 우리 삶에, 인권과 정의에 어떻게 해로운가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도서출판 부키, 2011

감옥 생활을 하다보면 자주 접하게 되는 이야기들 중 하나가 ‘긍정주의’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라.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해라. 항상 웃는 얼굴로 지내라.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수용자들 사이에서도 당연한 삶의 지혜 같은 것인 양 언급되곤 하고, 소장부터 현장의 법무주임에 이르기까지 직원들도 자주 입에 올리곤 한다. 매일 아침 지나가며 보는 복도에는 “긍정적인 생각이 성공을 낳습니다.” 등의 표어가 걸려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사례를 들자면, 나와 일대일 면담을 하며 쉴 새 없이 웃는 표정과 긍정적 생각을 강조하고 내 사고방식이 부정적이라서 서신검열을 하는 데 찬성한다고 했던 교도소장도 있었다. 어느 겨울날, 일주일에 한 번 온수목욕을 하는 날에 수용자들에게 “물이 별로 안 따뜻할 수도 있는데 불평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라.” 라는 말을 한 직원 역시 기억에 남아있다.

긍정주의는 공식적인 프로그램으로도 감옥 안에 들어와 있다. 감옥에서 수용자들에게 실시하는 인성교육 내용 중에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등의 내용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교도소에서 수용자들에게 1,000가지 감사한 일들을 적는 <감사노트>란 걸 나눠준 적도 있다. 국제구호단체에서 활동하는 어느 연예인이 교도소에서 특강을 했었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갖고 온 거라던가. 교도소에선 수용자들 중 <감사노트>를 열심히 쓴 사람들을 뽑아 취재시켜서, 조선일보에 기사가 나기도 했다. 내게도 직원이 <감사노트>를 썼는지 물은 적이 있는데, 내가 별로 감사하고 싶지 않아서 안 썼다고 하자 그 직원은 ‘배가 불러서 그런다’는 말을 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불만을 갖고, 즐겁고 좋은 선물 등을 받은 사람이 감사를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고려하면 매우 기이하고 불합리한 말이었다. 병역거부로 수감된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감옥 생활 자체가 불만스러운 내가 감사하고 싶지 않아하는 게 어째서 ‘배가 불러서’ 그러는 거란 말일까? 긍정주의는 이처럼 비상식적이고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사고방식으로도 나타나고 있었다.

지금 내가 감옥 생활을 하고 있기에 감옥 안 이야기로 예를 들었지만, 긍정주의가 감옥의 특징적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불공정할 것이다. 긍정주의는 온 사회에 걸쳐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있다. 자기계발서나 교육 분야, 의료나 건강, 기업 노동이나 경영 분야, TV방송을 비롯한 대중매체 등 일상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것들에 긍정주의가 스며들어 있다. 예컨대 (감옥에도 틀어주는) 어느 인기 아침 FM라디오 프로그램도 ‘긍정적 에너지를 전해주는 방송’을 표방한다. 이 프로그램은 그리 철저하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긍정주의적 메시지를 포함시키고 있다. 몇 개월간 그 프로그램을 들어본 바로는,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라는 코너에서 무슨 교수라는 사람이 정리해고 대상에 올라 걱정이라는 사연을 놓고 “긍정적 자세를 가지고 더 열심히 일하면 된다.”라는 대답을 했던 게 가장 두드러지는 긍정주의적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에게는 대단히 어이없게 들렸던 그런 이야기도 어쩌면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괜찮은 조언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기는 거의 주술적 미신에 가까운, 긍정적 생각의 ‘파장’이 어떻고 끌어당김의 법칙이 어떻고 하는 책들이 인기를 얻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긍정주의는 우리 사회에 완전히 진리이고 상식인 것처럼 자리를 굳히고 있다.

지나치게 허술한, 그러면서 해로운

앞에서 여러 차례 드러난 것 같은데, 나는 긍정주의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좋고 바람직한 것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에 따라오는 여러 이야기들 –불평, 비판 등 부정적 태도를 버려라, 세상의 좋은 면을 보고 만족할 줄 알아라 등등-을 접할 때마다 바로 ‘삐딱선 타는’ 모드가 활성화될 정도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긍정주의가 우리 사회에 대중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중반이었다. 그 때 한창 철학 입문서 등을 주워 읽으며 사고력을 키워가던 중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긍정주의적 교리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의심에 휩싸였다. 개념이 너무 허술해서 뭔가 사기같이 들렸던 것이다.

모든 것에 긍정적이란 건 무슨 뜻인가? 그러려면 ‘부정적인 것들’(아마도 슬픔, 분노, 좌절 같은 감정이나 불행한 일들)도 긍정해야 할 텐데. 그래서는 긍정적이기만 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 않은가? 결국 긍정적 사고, 긍정적 태도를 가진다고 하는 건 ‘부정적인 사고/태도’라고 규정한 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지극히 부정적인 사고방식 아닌가? 또 긍정주의는 긍정적, 부정적이란 개념을 쉽게 쓰지만, 사실 긍정에도 자신을 긍정하는 것, 타자를 긍정하는 것, 세상을 긍정하는 것 등 여러 경우의 수가 있고, 방식 면에서도 순응, 인정, 직면, 수용, 회피, 적대, 반성, 비판 등 다양한 양태가 있다. 이를테면, 보통 ‘분노’는 부정적 감정이라고 말해지는데, 분노 중에는 꼬이고 파괴적인 것도 있겠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건전한’ 분노도 있는 것이다. 긍정주의는 이런 복잡한 양상을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긍정/부정이란 말을 혼란스럽게 쓰고 있지 않은가? 이런 나름의 의심 끝에 내가 얻은 결론은 이러했다. 긍정주의는 뭔가 좋고 관대하고 넉넉한 느낌을 연상시키는 ‘긍정’이란 말을 앞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긍정’이란 개념 자체가 아닌 특정한 생활방식을 선전하는 것이다. 그 생활방식의 내용 중에는 쓸모 있는 것도 있으나 해로운 것도 있다. 긍정주의가 지금처럼 진리인 양 지나치게 힘을 얻고 있는 것은 별로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처럼 긍정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쓴 책이 있다. 근래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는,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도서출판 부키)이란 책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본인이 유방암 환자로서 겪었던 긍정적 사고 문화에서부터 기업 분야, 종교(기독교), 심리학, 경제·금융 분야 등까지, ‘긍정적 사고’의 모습과 폐해와 허구성을 추적한다. 예전에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로 생활해본 뒤 그 이야기를 쓴 르포를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는데, 『긍정의 배신』에서도 역시 많은 현장을 찾아다니고 자료를 조사하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등 발로 뛰는 노력과 바버라 에런라이크 특유의 신랄한 비평이 살아있다. 넓은 분야에 걸친 꼼꼼한 취재 때문에 책이 다소 산만하고 비슷한 얘기가 반복되는 듯 느껴질 때도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긍정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싶다.


부정적인 걸 억압하며 자아를 공격하는 긍정주의
『긍정의 배신』을 읽고 내용을 곱씹으며 그리고 내 경험을 돌이켜보며, 긍정주의가 어떤 점에서 우리에게 해로운지 대표적인 몇 가지를 꼽아보았다. 제일 첫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내가 처음부터 느꼈던 위화감, 긍정주의가 실은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부정적인’ 감정, 태도, 상상이나 사고방식, 심지어는 ‘부정적인’ 사람이나 사건들까지도 억압하고 배제할 대상이 된다. 『긍정의 배신』 역시, 미국의 긍정주의가 과거 칼뱅주의 기독교의 억압적인 내용에 반발하며 자라났지만 그 안에 칼뱅주의식의 자기규율 및 억압의 방식을 물려받았음을 지적한다. “긍정적 사고는 끊임없는 경계의 필요성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경계의 방향을 내부로 돌린 것에 불과”하며, “지붕이 무너지거나 일자리를 잃을까봐 걱정하지 말고 그런 부정적인 예상 자체를 경계해 쉼 없이 교정해야 한다고 촉구한다”(279쪽)는 것이다. “긍정적 사고는 ‘부정성’을 이유로 자아를 공격”(133쪽)하며 우리 자신을 적으로 삼는다.

이런 특성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감정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과잉된 긍정성이 자기착취와 우울증을 일으킨다는 『피로사회』의 논지를 교차시켜 봐도 좋으리라. 내성적인 성격, 슬픔에 공감하는 능력, 비판적 사유 등이 부당한 배척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긍정주의는 여기에서 고전적인 희생자·피해자 비난, 개인책임론 등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긍정적인 자세로 암을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내가 암에 걸린 건 부정적인 태도 탓이었다거나 내가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해서 암을 극복 못했다는 자책으로 변질되곤 한다. 빈곤이나 실업을 비롯한 불행한 일들도 그 사람들이 ‘부정적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 사람들이 ‘긍정적 태도’를 가짐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빈곤 등의 문제가 개인의 무능 또는 게으름 때문이며 사회체제 등을 탓하기보단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라는 오래된 사고방식의 한 변종임이 분명하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과 순응주의
내가 두 번째 긍정주의의 해악으로 꼽고 싶은 것은, 부정적인 것에 대한 억압 및 개인책임론과 동전의 앞뒷면처럼 얽혀있는 것으로, 바로 무력감과 순응을 조장한다는 사실이다. 부정적인 현실과 뉴스를 피하고 듣기 좋은 소식으로만 주위를 채우라고 권하는 긍정주의의 메시지에 대해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진정한 드라마로부터 물러선다는 것은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 깊은 무력감이 놓여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왜 뉴스를 나 몰라라 하는가? 전국강연자협회 대회에서 만난 어느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라고 말했다. 브랠리는 재난 보도에서도 눈을 돌리라면서 ‘재난 소식은 당신에게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부정적인 뉴스다.’라고 했다. 구호 기금에 기부하고, 반전운동에 참여하고, 인간적인 정책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고려조차 되지 않는다.” (92~93쪽)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외치고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믿으라고 하는 긍정주의가 무력감을 품고 있다는 건 역설적으로 들린다. 사실 긍정주의는 결코 긍정 그 자체에 근거를 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걸 포함하여)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긍정주의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것들의 목록은 선별적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체제에 순응할 것을 완곡하게, 종종 노골적으로 주문한다. 정리해고 같은 문제에서 긍정주의가 내리는 처방, 수행하는 역할이 대표적이다. 이런 작용이 불평하지 말라는 말, ‘부정적인 것들’을 배제하라는 말,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부정적인 반대자들, 불평꾼, 떼쟁이라고 딱지붙이는 일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내가 만나본 사회운동가들이 다수가 쾌활하고 따뜻한 사람들임을 생각하면, 참 사실과 동떨어진 딱지다.) 긍정주의는 아마도 비민주적 사회, 무력감을 학습시키는 사회 조건 때문에 창궐하게 된 것이겠지만, 결국엔 무력감과 순응을 정당화하고 부추기고 더욱 확산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권과 충돌하는 긍정주의
마지막으로, 나는 긍정주의가 인권이나 정의의 이념과 상충하며, 때론 인간의 가치를 낮추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예컨대 긍정주의 기획의 일종인 ‘감사하기’ 프로그램을 보자. 자기 삶에서 애써 감사한 일들을 찾아내게 하는 그 프로그램은, 사람들이 자기가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것조차 다른 사람(또는 신, 기독교 계열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많이 받아들인 것은 논해볼만한 주제다.)의 베풂이나 행운에 의한 것으로 보게 만든다. 앞부분에서 예로 든 조선일보 기사에는 수용자 누군가 <감사노트>에 ‘오늘 교도관이 나를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불러줘서 감사하다’라고 썼단 내용이 있다. 이렇게 최소한의 인격적인 존중이나 대우조차 ‘감사할 일’이 되면, 그런 존중을 하지 않는 걸 비판하기는 어렵게 되어 버린다. 이상한 가치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인권은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를 보편적 기준으로 제시하고 이를 통해 현실을 평가하여 개선하기 위한 이념이다. 반면, 긍정주의는 현실에서 좋은 면만 보고 만족하라고 하며, 어떻게든 세상을 긍정적인 곳이라고 여기기 위해 인간을 평가절하 하더라도 감수하곤 한다.

정의 관념은 또 어떤가? 영화『밀양』에는 살인자가, 자신이 죽인 아이의 어머니에게 미움으로 괴로워하지 말고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순간에 정의라는 가치는 사라지고 일종의 ‘긍정적 사고’를 통해 행복을 얻으라는 주장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더 정의로운 세상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라는 생각은 희미해진다. 행복은 다분히 유아론적으로, 정의나 윤리 등과 무관하게, ‘나의 긍정적 사고’에 달렸을 뿐이다. 하긴 부당한 일에 분노하기보단 감사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라는 주문이 가치관의 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노릇이다. 이처럼 긍정주의는 인권, 정의 같은 긍정적 가치들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서로 안 맞는 부분, 충돌하는 부분이 많다. 인권활동가로 살려는 내가 긍정주의를 좋아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꾸준한 비판, 매력적인 대안, 더 나은 세상

『긍정의 배신』에서는 긍정적 사고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현실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긍정주의의 지나친 득세를 막기 위해선 우선 『긍정의 배신』처럼 긍정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더 많이 나오고 더 활발해져야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론 불충분하고, 긍정주의를 대체할 만한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긍정주의 자체가 사람들의 불행한 현실을 덜 힘들게 만들려 하는 욕구에 부응하여 확산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현실주의’를 대체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어 보인다. 그 제안은 현명하긴 하지만 매력적이진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연대와 협력과 참여를 통해 행복을 얻자는 제안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런 대안들을 개인의 실천 과제이자 삶의 스타일로 제시하고 지역의 조직화된 프로그램이나 결사체 등으로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분노하라』처럼 건전한 분노를 권장하는 것도 긍정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나는 긍정주의가 필요 없는 세상을 생각해본다. 긍정주의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번창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는 사회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슬픔, 재난, 불행 등도 모두 삶의 일부로 마주하며 ‘진짜 긍정적으로’ 살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길, 그만큼 여유가 있고 행복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삶을 살길 바란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애써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할 필요가 없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긍정주의를 완전히 넘어서는 길일 것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 내가 할 일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 애쓰고 긍정적 믿음의 주문을 외우는 건 아닐 것이 분명하다.

*『긍정의 배신』에선 ‘긍정주의’란 표현은 직접적으론 안 나오고 주로 “긍정적 사고”란 표현이 쓰이고 있다. 나는 긍정을 내세운 이야기들이 규범력과 지배력이 있는, 체계적인 언설을 이루고 있다고 보고 ‘긍정주의’란 표현을 썼다.

덧붙임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이고, 병역거부로 현재 서울남부교도소에서 수감 중입니다. (지지와 응원 편지를 보내실 분은_ 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5호 489번 유윤종 _ 공현 후원카페 <공현과 함께라면> http://cafe.daum.net/gongh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