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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문헌읽기] 사회권에 관한 밴스 개념(Vance Conception, 1977)

한동안 햇살이 푸근하게 위로해주는가 싶더니 어김없이 꽃샘추위가 왔다. 봄마다 입에 담는 말이지만 ‘꽃샘’이란 말은 참 예쁘고 희망적이다. 길고 음습하게 꽁꽁 얼릴 추위가 아니라 봄꽃을 시샘하는 추위니까 곧 물러갈 거라며 움추린 어깨를 안아주는 것 같다.

그런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겨울 속에서 떠난 이들의 소식이 무겁다. 이름과 장소만 바뀌며 계속 반복되는 사연, ‘생활고 비관 자살’이란 늘 같은 제목을 단 소식이다. 그리고 그 소식은 언론의 윗머리에 잠깐 올랐다가 정치권의 소용돌이 소식으로 갈아치워졌다. 좀 더 길게, 좀 더 깊이 애도하고 곱씹었으면 하는 바람과 기대는 허무하게 배신당한다.

어느 깊은 밤이었다. 동생들은 모두 잠들었고 엄마는 맏인 나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당분간 ‘어디’에 맡길 테니 동생들 잘 보살피며 기다리면 엄마가 돈 벌어서 데리러 갈 거란 얘기였다.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그 ‘어디’가 고아원이란 걸 어린 나이였지만 알아들었다. 엄마가 결심을 결행할 그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불안한 나날이 계속됐다. 동생들이 말썽이라도 피울라치면 간이 오그라들었다. 엄마가 속상하면 그날이 더 빨리 올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일을 결행하지 못했다. 그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용기라고 말할 순 없지만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의 눈치만 살피던 그 불안한 나날들, 너무 속상한 날이면 ‘다같이 죽자’고 울먹이던 밤들이 갔다. 참 길고 추웠다. 지금 이 순간, 그 불안의 나날과 밤이 누구네 머리위에서 펼쳐지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하지만 그게 상상이 아니라 나날이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란 걸 누구나 알고 있다.

이번 세 모녀 자살 사건에 대해 제일 많이 쏟아진 말은 ‘복지 사각지대’란 말인 것 같다.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사각지대’란 ‘관심이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구역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복지의 사각지대란 말은 기존 복지 체계가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사각지대 운운하기에는 기존의 복지라 할 것 자체가 민망하다. 우산이 너무 작은데 우산 안에 들어오지 않아 비 맞은 것이라고 말하는 꼴이다. 요행히 우산 밑에 피해 있으면, ‘진짜 비오는 것 맞냐’며 의심하고 달려드니, 태풍을 만나지 않은 이상 그냥 비 맞으며 버텨야 하는데도 말이다.

[사진 설명] '송파 세 모녀와 가난 때문에 죽어간 이들의 위령제'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가 추모사를 하고 있다.

▲ [사진 설명] '송파 세 모녀와 가난 때문에 죽어간 이들의 위령제'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가 추모사를 하고 있다.


우산을 파라솔로 천막으로 키우는 데는 시민들의 적극성이 필요하다. 소수 열악한 계층의 필요를 최소한으로 챙기는 정도로만 복지를 생각하면 결코 정치의 주 관심사가 될 수 없다. 복지를 그런 수준으로만 대하면 대다수 시민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자기 주머니 단속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런 사건이 날 때만 정부를 타박한다고 해서 그게 정치의 할 일이 되지는 못한다. 가짜 수급자 색출, 자기와 가족 책임, 개인적 노력과 의무를 설파하는 주장들에 무심코 끄덕일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 우리 사회 속에서 존엄하다고 이해되는 삶을 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것을 챙겨서 생각해봐야 한다. 챙기고 곱씹어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자기 탓을 하거나 운명이라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무력감에서 나아갈 수가 없다.

바람직한 복지는 공익캠페인 광고나 선거 구호 속에 잘 담겨 있는 것 같다. 공익캠페인 광고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학비, 의료비, 노후, 육아 등을 걱정하는 사람들 맘을 콕 짚어 말해준다. 또 선거 구호는 그게 정치가 할 일이라는 것을 콕 짚어 알고 있는 것 같다. 속임수나 사기로 치면 고단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똑같은 속임수가 반복해서 먹히는 것은 속는 사람의 잘못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 캠페인과 구호를 실상과 대조하고 반박하고 저항하고 요구하는 활동이 절실하다. 그런 활동에 대해 그럴 시간과 자원이 있으면 자선이나 하라고 면박주거나 방해하는 것은 속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 같다.

속고 싶지 않을뿐더러 자선으로 죄책감을 떨치는 길을 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우산을 만들어 같이 써야 한다. 우산의 성격과 폭에 따라 복지, 생존권, 사회권이란 말을 가려 쓸 수 있다. 보편복지를 옹호하는 분들에게는 아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통념은 아주 열악한 계층에 대한 질 낮은 구제를 뜻한다. 생존권 또는 생계권은 ‘최소한의’ 생계를 뜻한다. 최소수준에 맞추니까 누리는 삶이라기보다는 부지‧연명하는 생명의 수준일 수밖에 없다. 반면 사회권은 존엄한 삶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권리이다. 물론 다급하고 먼저 충족시켜야 할 요구가 있다. 가장 힘든 사람들부터 구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두는 것과 애초부터 한계를 두는 것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우리가 만들고 키우려는 우산의 폭과 성격은 어떤 이름을 우리가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겉보기에는 똑같은 밥 한 그릇 일지라도 그것을 시혜로서 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로서 존중받는다는 것에 사회권의 의미가 있다. 복지를 국가의 선심성 혜택으로 보는 것과 시민이 응당 받아야 할 권리로 보는 것 사이의 차이이다. 권리란 그 상대방에게 존중의 의무가 발생하는 정당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것을 존엄한 삶에 필요한 목록에 올리느냐이다. 인권으로서의 사회권에 무엇을 어느 수준으로 넣을 것인가는 인권 분야의 오랜 고민이다. 최소기준을 주창하는 의견과 도달 가능한 최상의 수준을 주창하는 의견 사이에 지나친 최소화와 지나친 웅대함에 대한 염려가 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그 혼합이자 중간쯤에 해당하는 견해라 할 수 있다.

밴스 개념은 미국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정치인 사이러스 밴스의 이름을 딴 것으로, 1977년 조지아 대학에서 열린 법의 날 기념식 연설문의 내용에 주목한 것이다. 알다시피 미국은 사회권을 배제하는 자유권 중심 인권관을 피력해온 대표적인 국가이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정치인이 사회권을 인권의 내용에 넣은 발언을 했고, 그것도 최소한의 생계권을 주장하는 견해에 비해 한층 나아갔으니 주목받은 것이다. 기초생계 뿐 아니라 ‘건강보호와 교육’을 포함한 상대적으로 넓은 사회권을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활적 필요의 실현에 대한 권리”라 일컬었다.

사회권을 아예 인권으로 돌아보지 않는 세력도 많지만, 밴스 개념을 소극적이라 보는 견해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견해는 사회권에 대한 역량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드는 사람, 적극적인 참여자이자 기여자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시민인 우리는 정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고 정부는 그것을 보장해줄 적극적 의무가 있다. 적극적 의무라 해서 단지 국가가 궁핍한 사람을 돕지 않은 의무만 따지는 것이 아니다. 궁핍은 돕지 않아서가 아니라 국가의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활동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가령 부자에게 이로운 세제나 법, 공공서비스의 축소나 민영화 등이 가난한 사람을 더 어렵게 한다. 우리는 국가의 행동을 바꾸고 다른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형식적 권리를 지니는 게 아니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런 역량의 발휘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기본적 자원이 필요하고 시민들이 그런 역량의 하한선 이상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의 목표이자 국가가 보장해야 할 의무이다.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를 떠나 어쨌건 밴스 개념에서 사용한 “사활적 필요”라는 말이 맘에 맺힌다. 말 그대로 죽고 사는 일에 관계된 필요란 것이다. 그것에 대한 요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춥지만 한겨울은 아니라고, 적어도 봄에 대한 희망을 품은 꽃샘추위니까 같이 견디자는 믿음을 주는 사회가 내가 사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사회권에 관한 밴스 개념(Vance Conception, 1977년 4월 30일, 조지아 대학 ‘법의 날’ 기념식 연설)

… 시민권 운동의 초반 시절에 많은 미국인들은 그 문제를 “남부” 문제로 취급했습니다.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고 지금도 문제입니다. 이제, 하나의 국가로서의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됩니다. 인권 보호는 단지 소수의 지역이 아니라 모든 지역들에 해당하는 도전입니다. …

“인권”이 뭘 의미하는지 정의해보겠습니다.

첫째, 사람의 고결성에 대한 정부의 침해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침해에는 고문,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또는 처벌, 자의적인 체포나 구금이 포함됩니다. 공정한 재판에 대한 부인, 가정생활에 대한 침해도 포함됩니다.

둘째, 음식, 주거, 건강보호, 교육과 같은 사활적 필요(vital needs)의 실현에 대한 권리입니다. 우리는 이런 권리의 실현이 부분적으론 국가의 경제 발전 단계에 달려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이 권리가 정부의 활동 또는 활동하지 않음으로 해서 침해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자원을 엘리트에게로 돌리는 부패한 당국의 처리를 통해서나 가난한 사람의 곤경에 대한 무관심을 통해서 말입니다.

셋째, 시민‧정치적 자유들 -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자국 내외 모두에서의 이동의 자유, 정부에 참여할 자유 - 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은 이 모든 권리를 증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세계인권선언에서 인정된 권리입니다. …

우선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가령, 어떤 종류의 침해나 박탈이 있습니까? 그것의 정도는 어떠합니까? 침해에 어떤 유형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경향은 인권에 대한 관심을 향한 것입니까 아니면 인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까? 정부가 관련된 통제와 책임의 수준은 어떠합니까? 정부는 기꺼이 독립적인, 외부의 조사를 받으려 합니까?

두 번째로 던져야 할 질문은 효과적인 활동을 위한 전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활동은 인권의 전반적인 목적을 증진하는데 유용할까요? 우리의 활동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특정 조건을 실제적으로 개선할까요? 아니, 그 대신에 더 악화시킬 것 같나요? …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