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참사 당일에 벌어진 일을 복기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4.16연대는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을 추진하며 인권으로 4.16을 기억해보자고 제안한다. 기억은 행동이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는 열망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행동이 되어야 한다. <인권오름>과 <프레시안>에 매주 공동 게재되는 연재기사가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1.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미안하지 않았다. 수면 아래로 점점 사라져 가는 세월호를 바라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답답해하기도 했고,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을 땐 남들처럼 절망감과 무기력함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며 ‘미안함’이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중 다수가 단원고 학생들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온 국민들이 ‘지켜주지 못해 떠난 꽃 같은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토로했지만, 나는 정말로, 누구에게 무엇을 미안해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온 나라를 뒤덮은 ‘미안함’의 물결에 마음을 보태지 못하던 나는 나의 공감능력을 매번 의심해야 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으로, 혹은 ‘꽃 같은 아이들의 죽음’으로 세월호 참사의 비극을 이해할 때 부모의 지위를 가져보지 못한 나와 청소년들을 ‘꽃’으로 호명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 슬픔에 끼어들 틈이 없다고 느꼈다. 그렇게 사실 난 별로 미안하지 않은데 미안해야 할 것만 같은 불편함과 함께, 아프고 절망스럽지만 그 감정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답답함을 끌어안고서 참사 이후 1년을 보내왔다. 그러던 중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을 만드는데 동참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청소년-교육 운동을 하고 있는 내가 선언에 어떤 고민들과 목소리를 보탤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몇 번의 토론회와 회의에 참여하고, 일상의 번잡함 속에서도 ‘잊지 않겠다’던 다짐을 애써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과 둘러앉아 저마다가 꿈꾸는 ‘세월호 참사 이후의 세상’의 밑그림을 확인하고, 또 그렇게 내가 원하고 바라는 세상의 모습도 그려가면서 조금씩 명확해진 것 같다.
#2.
세월호 참사를 나의 문제로, 내 운동의 과제로 이해하려 애쓰고 나니, 이 비극을 떠올릴 때마다 나를 괴롭혔던 복잡한 감정의 뿌리들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교육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실패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그 수많은 단원고 학생 희생자들과 생존자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있어서만큼은, 너무나 명백한 청소년 인권침해 사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프고 절망스러웠던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단순히 운이 나빠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면, ’교통사고’ 따위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적 문제들이 뒤섞여 있다면, 참사의 발생 원인도, 사건의 성격도, 피해의 맥락도 역시 단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던지고 싶은 질문도 자꾸만 늘어갔다. 이윤을 위해 안전을 담보로 과적과 불법증축이 이루어지고 일말의 안전조치들조차 지켜지지 않던 세월호와, ‘대학입시의 성공’이 마치 수행해야 할 유일무이한 목표인 양 학생의 존엄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학교현장은 지독하게도 닮아있었다. 각종 규제 완화를 통해 세월호의 ‘위험한 항해’를 용인해왔던 세상은 교육현장에서조차 ‘살벌한 경쟁’을 용인하고 부추긴다. 그리고 진도 앞바다에서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던 이 무능한 국가는, ‘청소년 학업성취도 최상위국’의 타이틀을 뒷받침하고 있는 ‘청소년 자살률 1위와 행복도 최저’라는 현실 속에서 수없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야 할 학생들 역시 구조하지 못할 것이다.
#3.
청소년들의 ‘애도할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는 사회는 사실상 또다시 청소년들에게 ‘가만히 있기’를 강요하고 있다. 인권교육을 다니며 청소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어느 학교를 가건, 누구를 만나건 공통적으로 듣는 말이 있다. ‘원래 단원고 대신 우리 학교가 그때 세월호 타고 수학여행 가려고 했었대요.’ 정말로 해당 학교에 그럴 계획이 있었는지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학생들이 들려주는 저 문구에서 매번 이 참사의 피해자가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어떤 ‘공포’를 읽었던 것 같다. 이번엔 아니었지만 다음번엔 ‘나’일지도 모른다는, 똑같은 상황이 주어졌을 때 나 ‘역시’ 쉽사리 생존을 기대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만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공포. 그래서 청소년들이 온전한 애도의 권리조차 가지지 못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비단 ‘노란 리본’조차 마음 놓고 달지 못한다는 현실에 그치지 않는다. 나의 삶과 별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내던 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비극을 목격하고, ‘나’의 생존 역시 위태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이들이 모여 서로의 두려움을 가감 없이 내보이고 쏟아내면서 역설적으로 위로받고 치유할 기회를 빼앗은 것이기도 하다.
애도는 기본적으로 산 자의 행위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책임을 따져 묻거나 참사를 야기한 사회적 영역들에 대한 변화와 성찰을 요구하는 행위들 역시 ‘애도’의 한 갈래라고 생각한다. 떠난 자들의 삶 혹은 죽음이 던지는 의미들을 산 자의 삶 속으로 끌어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보다 더 강력한 ‘기억하기’의 방식은 없다고 믿는다.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세월호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벌점과 징계로 학생들을 겁박하지만, 이 온전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고 각자의 삶 속에서 세월호 참사를 이해하는 학생들이 많아질수록 지금의 학교와 교육은 더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간 스스로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민낯을 드러내는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비록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들로 표현될지라도,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고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 그게 전부이기도 하고.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학교 현실을 가장 잘 증언할 수 있는 이들은 그 공간 속에서 가장 밑바닥의 대접을 받는 청소년들이다. 온몸으로 학교 역시 안전하지 못하며 언제 침몰할지 모른다는, 그래서 ‘나’의 삶과 존엄이 위태롭다는 증언을 매일 같이 온몸으로 던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학여행 금지’나 ‘안전수영교육 확대’ 같은 얄팍한 대책들이 아니라 이 증언들에 더 귀 기울이고자 하는 의지이고 반성이다. 온전히 애도할 수 없고 문제를 직시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현실을 두고서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우리는 단언할 수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보다 더 안전하고 건강한 세상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단원고 학생 희생자들을 호명하는 방식이 ‘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꽃’과 같은 말에 갇혀있을 때 청소년은 ‘오늘’을 살아가는/던 주체적 존재가 아니라 마냥 미래를 기다리며 오늘을 유예하는 수동적인 존재에 그치게 된다. 또한 학생 희생자의 죽음이 참사의 비극성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고정되어버린 상황은 그들의 삶만큼이나 존중받아야 할 ‘죽음’의 의미 역시 훼손하고 만다. ‘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이 불편함을 넘어 위험한 말인 이유는, 세월호 참사의 발생 원인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사회구조적 문제들이 얽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어른’들이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로 참사의 의미를 축소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의미가 훼손되는 순간, 성찰의 영역도 대안의 방향성도 축소되고 변질될 우려가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남은 자들이 져야 할 책임은, 선장으로 대변되는 나쁜 어른들이 이 비극을 교훈 삼아 착한 어른들로, 그 개별적 도덕성의 회복이 아니라, 보다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의 촉구이다. ‘착한 어른’들이 지켜줄 때만 가능한 권리와 안전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더 많이 되물어야 할 때다. 청소년 역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대접받아야 하며, 그렇기에 마냥 보호받아야 할 ‘꽃’이 아닌 함께 싸울 수 있는 동료이면서 동시에 세월호 참사 이후의 변화를 위한 사회적 연대의 한 축이기도 하다.
#4.
사실 나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과 ‘부모가 되어본 적이 없는 나’ 사이에 어떤 넘지 못할 벽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늠하지 못하고 쉽사리 공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슬픔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 슬픔 앞에선 내가 느끼는 불편함도 절망감도 늘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늘 그 벽을 넘어가고 싶었던 것 같다. 벽 너머 서로의 존재를 당장 확인할 길이 없어 마냥 벽을 더듬으며 서성거리고만 있을까봐 애가 탔다. 함께 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래서 이 참사를 떠올리며 슬퍼해야 할 것 같을 때마다 나의 불편함이 무색해지게도, 나는 내 동생의 얼굴을 수없이 떠올렸다. 세월호 참사의 비극이 ‘자식을 잃은 부모 슬픔’으로 이야기되는 것이 불편하면서도, 도저히 이 뿌리 깊은 절망감과 슬픔을 가늠할 길이 없어 나는 자꾸만 내 동생을 끌어들였다. 세월호 희생자의 위치에 내가 사랑하는 내 동생의 존재를 대입하고,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것 같은 슬픔으로 세월호 참사의 비극을 이해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참사가 불러온 압도적이고 거대한 비극 앞에서 두 발이 꽁꽁 묶인 것 같은 절망감에 시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동생이 이 참사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고 이 모든 비극이 ‘나’의 비극이 아니라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위안을 받았다. 그 안도감이 못내 죄스러웠지만, 오로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비겁했고, 무례했다. 세월호 참사를 내 삶의 문제로 끌어들이고 나니 세상이 더 무섭고 지긋지긋해졌지만, 끝없는 절망감과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 사이를 한없이 헤매던 그때보다는 지금이 조금 더 나은 것 같다. 물론 나는 여전히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을 헤아릴 수 없다. 딱히 벽을 넘은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이곳에서, 나의 감각과 나의 고민으로 세월호 참사를 이해하고 더 많이 기억하려고 애쓰고 싶을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겪지 못했고 느껴보지 못한 경험과 감정을 끌어안고 사는 이들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덧붙임
혜원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