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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기억하는 4.16] 재난시대의 혐오

[편집인 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참사 당일에 벌어진 일을 복기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4.16연대는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을 추진하며 인권으로 4.16을 기억해보자고 제안한다. 기억은 행동이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는 열망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행동이 되어야 한다. <인권오름>과 <프레시안>에 매주 공동 게재되는 연재기사가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재난의 시대를 산다. 위험은 도처에 널려있고, 이내 재난으로 닥쳐온다. 재난은 제대로 예측되지도 수습되지도 않기 때문에 위기감은 일상이 되었다. TV 드라마나 영화, 소설, 웹툰 등 대중문화는 지속적으로 재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매일 매일이 재난에 대한 보도로 가득차 있다. 갈수록 재난과 파국에 대한 상상력이 확대되는 것은 우리의 세계가 그렇기 때문이다. 과거에 재난이 인간 외부, 즉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면, 이제 재난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문명으로부터 온다. 예컨대 쓰나미라는 자연재해가 방사능 유출이라는 인공재해와 만난 후쿠시마 원전 참사는 우리 시대 재난의 성격을 고통스럽지만 정확하게 보여준다.
물론 지난 20여 년 간 한국 사회를 사로잡았던 재난의 스펙타클은 조금 더 인공적인 재난에 집중되어 있었다. 1993년 서해 페리호 대형 참사로부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7년 IMF, 1999년 화성 씨랜드와 인천 호프집 화재 사고,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2007년 태안 기름 유출 사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 용산참사, 2014년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서 펼쳐진 재난의 스펙타클은 그야말로 ‘화려’했으며, 이 모든 참사는 인재(人災)였다. 참사의 반복은 그 절절마다 국가가 선보였던 대책들이 아무런 실효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2015년. 우리는 그 모든 재난의 상처를 안고서 ‘포스트 416’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재난의 시대’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재난의 시대

그러나 재난의 반복이 ‘재난의 시대’를 규정하는 전부는 아니다. ‘재난의 시대’라는 것은 무엇보다 자본주의라는 삶의 조건이 재난을 계속 ‘생산’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는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철학자 한병철은 “침몰한 세월호는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가라앉는 배를 탈출한 선장은 공공심을 그저 망상이게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육신”이라고 말한다. 세월호의 원인은 “규제완화, 노동 유연화, 민영화를 야기한 신자유주의”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규정짓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체제는 세월호 참사를 이미 예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그리고 그 당대적 판본인 신자유주의의 성격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세월호’는 언제고 어디에서고 다시 우리를 덮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재난의 시대’란 이 세계 자체가 재난에 근거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를 ‘위험사회’라고 규정한다. 위험사회란 ‘통제 불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사회다. 근대 이전에 위험이란 자연에 의해 야기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근대에 위험은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의 원칙으로 통제가 가능한 것으로 상상되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자연 정복에 대한 욕망은 근대에 이르러 달성된 듯 했다. 그러나 현대는 더 이상 “스스로 산출한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속시킬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인류의 자랑이었던 문명은 이제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적절한 보호책을 마련할 수 없는 위험”을 불러온다(벡; 2012, 22쪽). 자연을 예측하고 그 위험을 다스리고자 오랫동안 투쟁해 온 인간은, 역설적으로, 기술 발전이나 생산성의 급증과 같은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비롯되는 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다.

위험은 어떻게 분배되는가

그런데 현대의 위험은 평등하지 않다. 벡에 따르면, 우리 시대의 위험은 ‘결핍사회’에서 부(富)가 분배되었던 위계와 질서를 따라 분배된다. 위험이 실현된 것인 재난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공평하게’ 닥쳐오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대형 참사에서 10대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청소년 피해자가 특히 많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누가 더 빈번하게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살펴볼 수 있게 한다(이동연; 2014, 23쪽). 이때 ‘승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근대화가 생산해 온 위험은 “거대한 사업거리”다. “위험은 경제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 온 탐욕스러운 수요”인 것이다. “굶주림은 채워질 수 있으며 궁핍도 채워질 수 있으나, 문명의 위험은 밑빠진 독과 같은 수요를 가지고 있어서 충족될 수 없으며 무한히 자가 생산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온갖 위험에 대한 위협 뒤에 따라붙는 보험 광고를 흔하게 본다. 미리 미리 대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험에 가입한다고 해서 위험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보험이란 재난의 예방과는 무관하다. 보험은 재난에 대한 예측을 통해 장사를 하고, 그 예측이 현실이 되었을 때에는 가능한 지불을 유예시킨다. 보험이야말로 위험과 재난이 어떻게 시장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준다. 위험의 확산과 상업화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다.” (벡; 2006, 58쪽.)
이처럼, 위험의 상존과 재난의 발생은 누군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된다. 뉴올리언스의 허리케인 수해는 한 예다. 뉴올리언스가 카트리나로 초토화되자 재개발에 명을 걸었던 기업들과 공공영역 민영화를 추구했던 정치인들은 그 이해를 함께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동남아시아 쓰나미 이후 서구 자본이 유입되었던 경과, 남아프리카 해안의 서구 자본 유입을 반대했던 원주민들이 자연재해 이후 결국 그 자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 등에서 재난은 빈번하게 자본의 방법론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재난 자본주의’(나오미 클라인; 2008)다. 재난 자본주의에서 재난은 “시장을 만들 수 있는 흥미진진한 기회”가 되며, “공적 영역에 대한 조직적 공격”을 통해 신자유주의화를 가속화한다. 재난은 신자유주의화의 계기가 되며,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자유주의 시대의 삶의 조건은 다시 재난을 초래한다. ‘악순환의 고리’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4.16 인권선언 풀뿌리 토론 (출처: 4.16연대)

▲ 4.16 인권선언 풀뿌리 토론 (출처: 4.16연대)


안전이라는 판타지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재난이 반복될 뿐만 아니라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면, 이는 사회적 위기가 된다. 그리고 공유된 위기감은 인간 존엄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폐기해 버리는 반동적 복고주의의 도래를 불러온다. 사람들이 불안감 속에서 “자유나 평등 같은 근대적 가치보다 ‘안전’을 갈구”하게 되기 때문이다(문강형준; 2012, 22쪽). 유동성의 시대를 견뎌낼 견고한 세계관, 무너지는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구조적 안전망, 나의 불안을 잠재우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문화와 정서. 대중은 이와 같은 것들을 생명을 사지로 내모는 지배적 체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과 연합함으로써가 아니라, 전통적인 질서, 이미 익숙해서 이해하기 위해 따로 애쓰지 않아도 되는 신념 체계, 그리고 이미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득권의 인정 등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것들에서 찾으려 한다. 안전하다는 감각은 기존의 질서가 유지되고 그 질서를 유지해 온 권력에 의존할 때 더 쉽게 획득되기 때문이다. 상실의 고통이 경제 논리에 의해 간단하게 밀려나는 것 역시 우리가 이런 ‘쉬운 길’을 택하기 때문이 아닐까. 고통은 구체화되지 않지만, 경제는 쉽게 수치화되어 보여진다. 그리고 이런 경제논리란 한국 근대화 안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그 설득력을 갖춰왔다.
그리하여 재난 희생자들은 ‘우리’로부터 배제되어 ‘타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재차 확인할 때에야 우리는 안전이라는 판타지에 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고통을 말하고 체제에 문제를 제기하며 함께 일어날 것을 촉구한다는 이유에서 또다시 ‘이방인’이 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정답이어야 하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계속해서 여기에 머물러 기억해야 한다고, 이 재난의 폐허를 응시해야 한다고, 그렇게 ‘여기’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들은 불편하고 번거로운 존재들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재난의 피해자/희생자들을 ‘우리’로부터 배제되어야 하는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혐오는 어떻게 생산되나

국가 역시 재난을 체제와 구조의 문제에서 건져내어 재빠르게 개인의 문제로 만드려는 노력 안에서 혐오를 조장한다. 그렇게 세월호는 ‘일개 교통사고’가 되고, ‘유병언이라는 부도덕한 개인만의 책임’이 되며, 특정 정치세력이 정쟁의 기회로 삼는 오염의 장이 되거나, 일부 유가족이 생떼를 쓰는 몰지각의 공간이 된다. 예컨대 특별법을 제정하면 국가의 질서와 안위가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법석을 떤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이런 혐오의 수사는 대중들에게 의외로 쉽게 스며든다. 세월호와 혐오를 말하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폭식투쟁이나 ‘세월오뎅’ 같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폭력의 장면을 떠올리지만, 이런 예들의 나열은 세월호를 둘러싼 혐오의 정서를 예외적 사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극악한 그 표층을 걷어내고 나면, 기실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혐오의 정서는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혐오의 정서 안에서, 우리는 상실을 충분히 슬퍼할 ‘권리’를 박탈당한다. 슬픔은 분노와, 분노는 함께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 슬픔을 차단하고 혐오와 허무주의적 냉소로 분노를 희석시켜 버릴 때, 우리는 세월호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기 힘들어진다.
폭식투쟁을 하거나 ‘세월오뎅’ 운운하는 일베와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바로 ‘재미’다. 아니, 오늘날 재미야말로 누구에게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한때 ‘웃음’은 세계를 뒤집는 불온한 것이었지만, 이제 웃음은 세계가 생산하는 모순과 고통을 잊게하는 손쉬운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농담은 농담일 뿐”이라는 말은 농담을 농담일 수 있게 하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배경들을 보지 말라는, 그야말로 ‘가만히 있으라는’ 강요에 불과하다. 이렇게 재미와 웃음, 힐링을 통한 행복에의 추구가 정언명령이 된 시대에, 슬퍼하고, 애도하고, 분노하는 것은 그저 ‘노잼’일 뿐이다. 우리는 ‘노잼’이 슬픔과 분노를 반사시켜버리는 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불온한 것으로서 웃음을 되찾고, 그 웃음과 함께 충분히 슬퍼하고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 그것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과정으로서의 4.16 인권 선언의 일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참고문헌
나오미 클라인, 『쇼크독트린』, 김소희 역, 살림Biz, 2008.
문강형준, 「왜 ‘재난’인가? - 재난에 대한 이론적 검토」, 『문화/과학』 72호, 2012.
울리히 벡, 『위험사회』, 홍성태 역, 새물결, 2006.
울리히 벡, 『글로벌 위험사회』, 박미애·이진우 역, 도서출판 길, 2012.
이동연, 「재난의 통치, 통치의 재난」, 『문화/과학』 79호, 2014.

덧붙임

손희정 님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