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난 왜 지지리 운이 없을까? 타고난 재능도 외모도 별로, 받아온 교육도 살아온 지역도 별로, 이제 나이까지 별로가 돼가고 있네.
B: 별로인 게 한 두 가지여야지. 우린 왜 복지국가 같은 데서 태어나지 못하고 이런 데서 났을까? 알량한 일자리나마 잃으면 난 당장 길거리로 나앉아야 돼.
A: 내가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운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누가 이해해주는 것도 아니고.
B: 삶의 기대치가 없어. 내일도 오늘 같은 게 아니라 오늘보다 더 나빠질 것이란 생각에 무섭고 우울해.
A: 우리 벌 받고 있는 거지? 실패에 대한 처벌 말이야. 처벌을 할 때 면제 요건으로다 우리의 불운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B: 난 그건 싫어. 안 그래도 힘든데 운 나쁘단 동정까지 받는 건 싫어. 진짜로 생각해준다면, 불운의 비용을 나눠서 짊어져야지. 우리더러 운이 나쁘다고 하면서 사회구조적 문제는 덮어버리는 것 같아.
A: 맞아. 우리 개인의 자질과 조건 탓을 하면서 힘 있는 자들은 ‘어쩔 수 없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거야. 나의 불운을 동정할 게 아니라 나를 불운하게끔 만든 제도나 규범의 잘잘못을 따지고 바로잡으려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뭐? 개혁이랍시고 쉬운 해고를 일상화하겠다고?
B: 야,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운이 나쁘단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냐? 불리하고 유리하고가 결정되는 것은 사회구조적 맥락 속에서인데, 왜 우린 우리의 운을 탓하고 있지?
A: 내가 운 타령을 시작했지? 가만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 대해서만 불운이란 말을 함부로 쓴 게 아닌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 벌어진 일, 사회적으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함부로 운을 남발한 것 같아.
B: 그러게. 세월호 참사가 불운이니? 불의에 의한 거니? 시위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게 운이 나빠서니? 공권력의 불의한 행사 때문이니?
A: 불의한 거지. 마찬가지로 따져 묻고 싶어. 내가 여자로 태어나서 차별받는 게 불운이니 부정의니? 내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불이익을 겪는 게 불운이니 부정의니?
B: 불의하고 부정의한 거지. 이놈의 사회는 내가 뭔가 하기도 전에 사회 속의 내 자리를 강제배치 해버렸어. 강제배치 해놓고선 그 자리에서 겪게 되는 억압과 박탈을 나더러만 고스란히 참아내고 받아내란 거지.
A: 내가 내 삶에 대해 책임을 안지겠다는 말이 아니야. 강제배치 된 자리에 대해 뭔가 이의를 제기하고 시정할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
B: 조금만 틈새가 있으면 타인을 구별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 차별과 억압을 당연시하고 부추기는 언론, 불평등과 억압을 시정하려는 제도를 만들지 않는 국가, 혁신 없이 사람 쥐어짜기로만 이윤을 취하려는 기업, 뭐 이런 것들이 적극적으로 어울려서 빚어낸 불의가 지금 내 위치에서 겪는 고통이라구. 내가 운이 나쁘고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구.
A: 그냥 운이 나쁘다는 말, 이제부터 취소야. 이건 불운이 아니라 불의의 문제라구.
무력감의 퇴치약, 책임의 인정
A: 하지만 그 불의함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또 나의 문제네.
B: 인터넷에서 그 동영상 봤니? 우유를 먹으려다 주둥이가 우유통 입구에 박혀 꼼짝달싹 못 하게 된 야생곰 말이야.
A: 응. 봤어. 다행히 구조돼서 야생으로 되돌아갔다고 하던데. 근데 왜?
B: 문득, 내가 우유통에 박혀 있단 생각이 들었어. 내 시간의 대부분을 남의 장소에서 일하며 굴욕적으로 보내는 나 말이야. 먹고 살기 위해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되뇌이며 불의한 일을 봐도 내 주둥이를 꽉 다물고 있어.
A: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우리뿐이니? 그저 ‘사는 게 죄다’ 여기며 사는 거지.
B: 그래. 대개가 그렇지. 내가 특별히 나쁜 사람인 게 아니라고, 불의한 일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자책하면서 그래도 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괜찮은 인간이라고 위안하려고 해.
A: 우린 불운에서 무력감으로 옮겨왔구나.
B: 그래. 무력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무력감. 근데 가만히 있으면 죄를 짓는 건 아니지만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그럴 때 뭐라 말 못할 수치심으로 힘들어.
A: 책임? 나를 부양할 의무, 가족을 돌볼 의무, 이런 의무만으로도 벅차 죽겠는데 또 무슨 책임을 더 질 수 있을까?
B: 그런 의무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냐. 싫어도 내팽개칠 수도 없고. 하지만 성격과 종류를 달리하는 책임이 있는 것 같아. 나의 생존과 경력에 관계된 것만이 아닌 책임 말이야. 뭔가 아닌 거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할 책임, 아닌 걸 바로잡기 위해서 뭔가 도모할 책임 같은 거 말야.
A: 우린 그 ‘아닌 것’으로 이뤄진 체제의 희생양이잖아. 피해자인 우리가 그 ‘아닌 것’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 한다구? 갑자기 억울해진다. 책임질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B: ‘아닌’ 것에 의해 권력과 특권, 이익을 누리는 자들이 져야 할 책임과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의 종류와 정도는 다를 거야. 사회적으로 처한 위치가 다르니까.
A: 하긴, 책임을 따져 묻는 사람들이 없다면 누가 책임을 인정하겠어? 명백하게 저지른 법적인 죄도 유유하게 빠져나가는 게 권력이고 특권인데.
B: 그래. 눈앞에서 방아쇠를 당긴 놈만 처벌하고, 쏘라고 명령하거나 허용한 권력자는 당장의 인과관계에서 늘 멀리 떨어져 있는 법이지. 누군가는 그런 은폐의 구조를 드러내고 불의를 시정하도록 요구하는 역할을 해야지.
A: 하지만 그런 일 할 사람이나 조직은 따로 있겠지. 나 같은 개인이 뭘 할 수 있겠어?
B: 나도 그런 생각을 자주 해. 그래서 괴로워. 자꾸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 자신이 우유통에 박혀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니까.
A: 네 기분은 알겠는데, 그 책임이란 게 나에게는 불가능한 요구로 보이는 것도 어쩔 수가 없어.
B: 우리는 불운이 아니라 불의의 문제란 얘기를 했잖아. 불운이 아니라 불의의 문제라고 판단한 것에서부터 뭔가 시작되는 게 아닐까? 운은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불의의 문제라는 건, 뭔가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인정한 거 아니겠어?
A: 근데, 내가 그런 책임을 인정한다 치자. 우리 말고도 이걸 불의의 문제라고 판단할 사람들이 많을까?
B: 글쎄. 다들 살아남기에도 벅차하는 게 현실이니까. 하지만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개인적 불운이 아니라 공적인 불의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겠지. 그걸 연결하고 모으는 게 큰 문제지만 말이야.
A: 내가 ‘누구 없어요?’라고 소리치면 ‘나, 여기 있어요’라고 바로 답이 왔으면 좋겠다.
정치적으로 응답할 의무
B: 너는 내가 보낸 카톡이나 문자에도 바로 답하지도 않잖아.
A: 내가 언제? 어쩌다 그런 걸 갖고. 너는? 대답 못할 상황이란 게 있는 거지.
B: 핑계 아니고?
A: 아니라니까.
B: 반응이나 응답이 없는 건 정말 힘들어. 만약 이게 너와 나 사이, 사적인 소통이 아니라 공적인 문제라면 어떨까?
A: 내가 구조적 불의나 막대한 인권침해의 피해자라면 속이 터지겠지.
B: 책임진다는 건 응답한다는 거래.
A: 응답한다?
B: 책임이란 말의 영어 표현은 responsibility야. 이 말은 응답한다는 response에서 나온 거래.
A: 난, 불의한 제도나 행동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껴. 뭐, 어쩌다 한 푼이라도 보태려고 할 때도 있고.
B: 나도 그래. 공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진 못해도 불의하게 여겨지는 그런 부류에 끼지 않으려 애쓰고 뒤에서 욕하고 흉도 보고.
A: 고통에 대한 공감, 내심의 자책, 그런 불의를 저지하지 못하고 방관하거나 때론 지지한 것에 대한 반성, 뭐 이런 거는 나도 많이 하는 데.
B: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더라도 작은 선의라도 보이고 싶은데, 그게 어쩔 땐 불안해. 불의의 피해자들이나 저항하려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려 드니까. 나는 그저 내 작은 선의에 만족하고 있는데….
A: 그럼, 우린 응답한 걸까?
B: 글쎄. 우리가 보낸 신호가 아니라 신호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과연 응답이 왔다고 여길까?
A: 공감과 위로를 원하겠지만 그보다 더 피해에 대한 공적인 인정을 원하지 않을까? 피해를 일으킨 불의에 대한 인정과 시정의 약속을 원하지 않을까?
B: 그건,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응답이잖아. 여럿이 함께 애써야 할 수 있는 응답이지.
A: 하지만 그 여럿 속에서 나를 제외할 수는 없는 거잖아.
B: 그렇지. 그래서 그냥 응답할 의무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응답할 의무라는 말을 하나봐.
A: 정치적으로 응답할 의무? 왜 정치적이야? 인간적인 응답, 뭐, 그런 걸론 안되는 거야?
B: 각 개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지만 혼자선 못한다는 거야.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거지. 변화를 위해 서로의 관계를 만들고, 더 정당하고 효과적인 행동을 위해 공적으로 조율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거야. 그래서 정치적인 거지.
A: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 참여의 장이 너무 없잖아. 내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니지만, 집회나 시위하는 것만으로도 노조를 조직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회에선 난리가 난 줄로 알아. 그런 사회에서 참여의 장이 도대체 어디 있어?
B: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도 많지. 성소수자나 이주노동자 등이 차별 당하는 걸 지켜보거나 되려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거, 심지어 진짜 다가가 부수고 때리기도 하지. 당국이나 주류 언론이 퍼뜨리는 말을 비판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저항도 없고 조용히 지내는 상황이 정상적인 거라고 여기는 거, 그런 게 정치적 참여의 장을 조이고 점차 사라지도록 돕는 걸 거야.
A: 그렇게 불의나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가치관, 태도, 관행 등을 상대로 싸우는 게 정치적 응답일 텐데. 그거 하다가 억압 받을 게 무서워.
B: 그걸 무릅쓰고라도 해야 한다는 거지. 그게 없고서야 어떻게 변화란 걸 기대할 수 있겠어. 투쟁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내는 게 정치적 응답의 의무인거지.
인권과 책임
B: 적어도 기본적 인권에 관련된 제도들은 지켜나가야지. 공권력을 관찰하고 감시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어야지, 반대로 공권력이 우리를 관찰하고 감시하고 비난하도록 냅둬서야, 불의가 판치라고 면허장을 발급해주는 거지.
A: 그런데 도대체 인권에선 왜 그런 사람들의 책임은 말하지 않는 거야? 인권침해를 정상적인 것처럼 여기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B: 그건 오해야. 책임이 함축돼 있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거나 분명히 책임을 지적하고 있는데도 잘 듣지 않으려는 데서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아.
A: 하지만 인권선언 등을 보면 죄다 권리의 이야기지 의무나 책임은 없는 거 같은데.
B: 권리라는 건 반드시 그 권리에 따른 의무가 있기 마련이거든. 권리와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란 ‘권리 없이 억압적으로 강제되는 의무’와는 다른 거야.
A: 그럼, 책임에 대해 말을 아껴온 것이 의무를 이상한 쪽으로 끌고 가니까 경계하려고 그런 거 아냐? 지배적인 규범을 정해놓고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에 의무라는 이름을 씌우니까 말이야.
B: 그러게. 우린 의무란 말에 질릴 정도로 많은 의무를 짊어져왔어. 그런데 정작 젤 중요하고 기본적인 의무와 책임은 무시하고 살라는 지시를 따라온 것 같아. 모든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권을 갖는다고 하지.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져야 할 어떤 숭고한 의무가 있는 게 아닐까?
A: 세계인권선언 마지막 부분을 찾아봤어. 네 말대로 의무와 책임이 여기 끄트머리에 숨겨있네. 여기 보면 ‘인권이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체제 및 국제체제’에서 살아갈 권리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말하고 있어.
B: 적어도 구성원을 굶기거나 무책임에 죽어가도록 방치하는 게 공동체는 아니겠지?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란 구성원들이 서로 호혜적으로 책임지는 행동을 통해 구성하는 공동의 세계야. 각자는 타인과 공동체에 대해 예외 없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고 사회적 위치와 구조적 맥락에 따라 그 책임의 종류와 성격이 다를 뿐이야. 국가나 대기업 등 권력이 감당해야 할 의무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져야 할 책임과 같을 수는 없지.
A: 특권에 맞서 인권이 빛을 보려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보완하고 향상시킬 의무를 져야 하는 데, 막막하긴 하다.
B: 타인과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요구 앞에서 나도 내가 뭘 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의무가 불명확하다는 건 책임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 거야. 어떤 방법과 행동으로 책임질지가 열려있다는 뜻이야. 우린 서로에게 무슨 행동을 한 것에 대해, 또는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충분하지 않거나 오히려 역효과를 낳은 행위에 대해 비판하고 변화를 위한 행동을 요청할 책임이 있어.
A: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면 도덕적으로 괜찮은 인간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정치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인간이 될 순 없을 거야. 뭔가 ‘이건 아니다’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아닌 것에 대한 도전’을 행동으로 보여야 되는데, 참…. 이건 내 불운보다 다루기가 힘든 과제구나.
B: 일단 우린, 회피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시작은 한 거겠지? 빠꾸하기 없기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