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열 받아서
A: 뭐가?
B: 어떤 자리에 갔는데 날 사람 취급 안하잖아. 면전에 두고도 날 없는 사람 취급하더라구.
A: 그래서 빨간 물이 얼굴이 들었구나. 사람을 사람 취급 안한다? 대체 어떤 식으로 당한거야?
B: 말하자면 길어. 그들에게만 조명이 켜있고 나만 암흑 속에 서 있는 것 같았어.
A: 마음 가라앉으면 차근차근 얘기해 줘. 근데 우리, 이제 그런 거에 무뎌질 때도 되지 않았니?
B: 그게 어떻게 무뎌질 수가 있어?
A: 그래야 살아남지. 너처럼 뻘겋게 달아오르다가 혈압만 오른다. 뭐 달라질 기대도 없고 맘만 상하니까 그냥 신경 꺼.
B: 너까지 더 열 받게 할래? 신경 끄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면 왜 열이 오르겠어?
A: 미안 미안, 하도 사람에 대한 모욕이 판치다보니 무감해지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냥 툭 튀어나온 말이야.
사람 취급 안하기
B: 사람에 대한 모욕이 판친다? 너도 뭔 일 있었니?
A: 사람관계에서 당하는 일이 어디 한 두 가지겠어.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지. 자존감을 떼놓고 다닐 수도 없고…, 왜 이리 서로 자존감을 해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됐는지 모르겠어.
B: 사람들이 정당한 비판과 모욕을 분간 못하는 것 같아. 모욕이란 자존감에 가하는 공격과 훼손이야. 정당한 비판과는 다른 거라구. 정당한 비판이라면 나의 태도나 일을 반성적으로 고치거나 하면 돼. 하지만 자존감 훼손은 날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거라구.
A: 사람취급 하지 않는다는 게 심정적으론 느껴지는 데 뭐라 콕 짚기가 어렵다.
B: 심정적으로 단지 기분 나쁜 거하고는 달라. 모욕이란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 고의적으로 어떤 사람에게서 중요한 자유와 힘을 뺏는 것을 말해.
사물 취급
A: 가령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나 도구처럼 취급하는 것?
B: 그거라면 신물 나도록 경험해봤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줄곧 들어온 ‘인적 자원’이란 말, 요즘 듣는 ‘쓸모없다’는 의미의 ‘잉여’라는 말 ….
A: 쓸모없다 하면서도 우린 정말 훌륭한 기계취급을 받지. 서울의 야경이 실상 ‘야근의 불빛’이라는 과중한 노동은 어떻고? 학창시절 12시간 이상의 학습 노동을 견뎌냈더니 휴식 없는 노동이 기다리더라. 기계도 그 정도 썼으면 닳아서 고장이 나도 숱하게 났을거야.
B: 그렇게 부려먹으면서도 우릴 ‘한번 쓰고 버리는 종이컵’ 취급하잖아.
A: 그렇지. 우리 말고도 쓸 ‘종이컵’은 많으니까. 우린 정말 종이컵보다도 못한 물건이지.
B: 며칠 전엔 손쉬운 해고를 합의고 개혁이란 이름으로 통과시켰더라. 잘리는 건 ‘저성과자’에 ‘근무불량자’래. 불량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눈감고 죽은 듯 엎드려 지내란 거네.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
A: 이렇게 사람취급 못 받는 예가 많은데 또 있을까?
B: 타인을 피부색, 외모, 몸무게, 치수 같은 것으로 보는 거.
A: 맞아 맞아. 난 여성을 비하적으로 말하는 ‘출산기계’, ‘고깃덩어리’, 이런 말들 정말 싫어. 인터넷 사이트만 열면 튀어나오는 뉴스 봐봐. 여성배우는 왜 ‘굴욕 없는 몸매’, ‘출산 후에도 완벽한 몸매’, ‘빛나는 생얼’ 등으로만 묘사하는 거야? 연기에 대한 얘기는 왜 남성배우에 치우쳐서 하는 거야? 사람을 몸으로만 보는 건 그 사람의 의지나 자유 같은 영혼을 빼놓고 보는 거잖아.
B: 또 그거 있지? 요즘 말 많은 몰카. 정말 모욕 아니니? 내 속옷, 배설…, 그런 걸 누군가 함부로 찍어 노출시킨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모욕이야. 여성인 내가 내 사적인 영역을 지킬 수 없다는 건 이 사회에서 내가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지켜내는데 절대적으로 무력하다는 거고, 그걸 침해하는 쪽이 여성을 전혀 사람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의미야. 그런 걸 ‘평범하던’ 사람의 ‘순간적 일탈’로 표시하는 언론은 모욕을 선동하는 거고.
A: 아까 네가 ‘고의적으로 어떤 사람에게서 중요한 자유와 힘을 뺏는 것’이 모욕이라 말했지? 몰카라는 게 나에게서 내 사생활을 통제할 힘을 뺏어가지, 또 그것의 침해에 항의하고 지킬 자유를 무시하고 있는 거네. 정말 심한 모욕이다.
B: 왜 ‘여성’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거야? 가령 조폭에 소속된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할 수 있지만, 사람이 ‘자기’라는 걸 형성하는 데 합당한 정체성을 열등한 것으로 찍어서 거부하고 괴롭히는 것 또한 모욕이야.
A: 맞아. 나를 사람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성, 피부색, 종교’ 등이 포함되는 데 그걸 가지고 ‘눈에 띄지 말라’고 명령하거나 심각한 결함이 있는 인간으로 대하는 건 모욕이야.
B: 물건이나 기계 취급, 인간 이하 또는 열등한 인간 취급, 한마디로 비인간 취급 속에서 사람으로 살아가기 정말 힘들다.
제도적 모욕
A: 게다가 자존감에 상처준 걸 피해자 탓이라고 몰아붙이는 건 어떻고. ‘네가 못나서’ 또는 ‘네가 오해해서’라고 하면서 모욕당했다고 간주될 만한 조건이나 상황마저 왜곡해버리잖아.
B: 별난 개인들만이 문제가 아니야. 왜곡이란 점에선, 개인적인 모욕만이 아니라 제도적 모욕이 더 심각한 것 같아.
A: 제도화된 모욕?
B: 어떤 개인이 못되게 날뛰는 것 말고 이 사회의 제도 자체가 조직적으로 모욕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 말야.
A: ‘정규직 노동자’ 또는 ‘쉽게 해고되지 못할 인재’가 되는 건 ‘네 노력에 달렸다’는 식으로 책임 전가하는 게 떠오르네.
B: 노동권 있지? 난 요즘 이 말이 너무 아프다.
A: 말만 들어도 아픈 단어가 있지. 나는 안전장치 없이 스크린도어 수리하다 죽은 노동자 생각이 나네. ‘용광로’였다가 ‘창고’였다가 ‘스크린도어’였다가, 앞의 말만 바뀌지 ‘안전장치 없이 방치된 노동자의 죽음’이란 조건과 상황은 변함이 없어. 이런 게 제도적 모욕이 아니면 뭐가 제도적 모욕이겠어?
B: ‘권’이란 말에는 ‘옳다’는 뜻과 그 옳고 정당한 것을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란 뜻이 들어있대. 그러니까 ‘노동권’이란 말은 ‘노동에 관하여 옳은 것’, ‘노동에 대해 옳은 것을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노동자에게 있다’는 말이지.
A: 그런데 사람들은 ‘네가 스펙을 덜 쌓아서 그래’, ‘좀 더 노력하지 그랬어. 좀 더 유능하지 그랬어’란 식으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해. 그래서 취직 못한 사람, 해고된 사람, 사고당한 사람이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지. 거기다 대고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고 앞 세대 임금을 잘라서 주고, 기부금을 조성해서 돕겠다는 건 제도적 모욕의 극단이야.
B: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필수적인 물질적 자원이 있잖아. 제대로 차려입고 나갈 수 있어야 하지, 제대로 씻고 잘 수 있어야지, 제대로 먹을 수 있어야지, 이걸 죄다 형편없는 노동환경에 방치해두고 사회보장제도에도 인색하면 어쩌란 건지 모르겠어.
A: 난 솔직히 무서워. 나는 집은커녕 방도 없어.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어, 삶의 장기적인 계획 같은 걸 세울 수가 없어. 뭘 배우고 싶어도 돈과 시간이 없어. 휴식도 아플 때의 치료도 공공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아니라 다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돼. 이런 조건에서 누굴 돌보기는커녕 내가 날 언제까지 돌볼 수 있을지가 두려워.
B: 그만, 그만! 나 또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아.
모욕의 결과들
B: 너, 아까 나보고 ‘신경 꺼’라고 말했지? 많은 사람들이 모욕을 대할 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그 사람들(모욕의 가해자)이 정당하지 않은 데 왜 네가 위축돼? 네가 떳떳하면 됐지.’ 또 ‘그런 자들을 뭘 중요하게 생각해. 그냥 XX다, X같은 것들, 그래 버리면 되지.’
A: 미안하다고 했잖아. 사실 나도 ‘나만 아니면 괜찮다’, 이게 정말 통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또 ‘X같은 것들’ 이래 버리고 말면, 나도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는 거고 같은 방식을 쓰는 거잖아.
B: 맞아. 솔직히 남을 모욕하는 사람들이 사람 취급을 안하다고 하지만, 사실 ‘사람’이란 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걸 거야. 사람이니까 모욕감을 느끼는 걸 아니까 그걸 이용하는 거라구.
A: 모욕으로 사람을 괴롭혀서 도대체 뭘 얻으려는 걸까?
B: 우리가 무력감을 느끼는 걸 보고 즐기려는 게 아닐까? ‘넌(너흰) 내 수중에 달려있어.’ 뭐 이런 거. 타인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있다는 우월감, 조종력을 느끼고 싶은 거지. ‘넌 스스로 네 삶을 결정할 수 없고 키는 내가 쥐고 있어.’ 이런 메시지를 모욕을 통해서 전달하는 거야. 그래서 삶의 통제력을 피해자에게서 뺏어가고 무력감과 의존성을 강요하고 싶은 거야.
A: 모욕 받아도 가만히 있다보면 자기 걸 뺏겨도 덤덤해지겠네?
B: 실제로 역사적 사례를 보면, 내쫓고 싶은 사람이나 집단을 우선 대놓고 모욕하는 데서 공격이 시작돼. 모욕을 당하는 데도 가만히 있으면, 또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저 남 일 취급하며 구경하다보면 모욕이 자연스런 일상이 돼. 그때부터는 법이나 제도로 그 사람들의 권리를 없애거나 줄이는 게 얼마든지 가능해.
A: 우리 노동자들 처지 같다. 대놓고 노동자를 되고 싶지 않은 ‘하층’계급 취급하고 감정노동이니 서비스 정신이니 해서 하인 취급하는 걸 내버려두고, 나는 ‘소비자’로서 누리고 대접만 받고 싶다, 뭐 이러다보니 노동권이 쥐락펴락 맘대로 되고 있잖아.
B: 더럽고 아니꼽지만, 그런 우월감이나 권력을 즐길만한 위세를 가진 사람들이 있지. 그런데 그런 처지가 아니면서도 남을 모욕하는 사람들은 뭐지? 그럴 처지가 못되는 사람들이 왜 더 악랄하게 남을 괴롭히는 걸까?
A: 그건 번지수 잘못 찾은 폭력이 아닐까? 자기에게 진짜 모욕을 준 쪽이나 제도적 모욕에는 입도 벙긋 못하겠으니까 약한 쪽을 골라 분풀이하는 거지. 모욕에 손상된 자존감을 더 약한 타자를 해치는 것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것, 그게 모욕을 재생산하고 모욕에 대한 진짜 저항을 가로막는 걸 거야. 사실 개인적 모욕이랑 제도적 모욕은 따로 노는 게 아니라 같이 다닌다고 할 수 있어.
B: 사람의 말과 행동은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이잖아. 움직이면서 영향을 만들어 내. 모욕을 모욕으로 돌려막기 하다보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처럼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 ‘못났다, 못났다, 못나서 저렇게 됐다’는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니까 그게 문제의 원인이 돼버리고 우린 실제로 ‘못난 사람’이 돼버렸어. 그래서 모욕에 대해 같이 저항할 동료는 없고 사방에서 날 못났다고 째려보는 불특정다수에 둘러싸여버렸어. 그래서 특별히 날 모욕하는 사람이 없어도 난 늘 ‘아무것도 아닌’, 그저 ‘노바디’란 굴욕감을 느껴야 돼.
무감해지지 않을래
B: 난 모욕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고 싶지 않아.
A: 난 모욕에 덤덤해지려는 것부터 다잡아야겠어. 나, 민감해질 거야. 말리지마. 너, 아까 뭣 때문에 열 받았다고 차근차근 얘기해준다고 했잖아. 이제 얘기해봐.
B: 이미 충분히 얘기했어. 앞서 한 얘기가 전부 내 얘기 같아. 그냥 이런 말을 하고 싶어. 난 사람이니까 모욕감을 느낀다구. 나에겐 존엄성이 있고 그에 따른 자존감이 있다구. 이건 명예심이나 자부심과는 다른 거야.
근데, 내 자존감은 나 혼자의 세계에서 만들어지고 완성되는 게 아냐. 그 사람들의 눈으로 날 보게 돼. 그냥 기분 나쁜 문제가 아니라 그런 눈을 통해 그 사람들은 나에게 영향을 줘. ‘나는 여기서 입을 열면 안된다. 난 발언권이 없구나. 내가 저 사람들이 날 바라보는 눈을 바꿀 수 없구나.’ 이런 무력감이 든다구. 그래서 어디론가 숨고 싶어져. ‘괜찮다! 괜찮다! 괜찮아!’ 나를 아무리 내가 달래도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아. 다른 사람들이 내게 보이는 태도에 계속 신경 쓰인다구. 나는 내 방에서 혼자 나는 나를 존중한다고 되뇌고 싶은 게 아니라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내가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고 싶다구.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