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다른 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K대에 다니는 어느 학생의 평가이다. 대학서열에 대한 인식이 인간등급에 대한 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단지 한 개인의 삐뚤어진 특권의식의 발로일까? 연세대 신촌캠퍼스의 학생들은 원주 캠퍼스의 학생들을 절대로 동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같은 인터넷 게시판에는 “원세대(연세대 원주 캠퍼스-인용자) 다니는 친구 놈이 나한테 ‘동문, 동문’ 거리는데 원세대 놈들 중에 이렇게 신촌을 자기네하고 동급 취급하는 애들 있을까봐 심히 우려된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서울대에서는 학내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다른 대학출신의 대학원생과 편입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많은 학생들의 공감을 얻기도 했다. "타대 출신 대학원생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인식 자체는 수준 미달 '학력세탁충(蟲)'", "남을 내 집에 들이기 싫은데 이유가 있나?", "대학원생은 총학생회장 투표권이 없는 걸 보면 주인이 아니라는 뜻" 등** 다른 대학출신의 대학원생에 대한 강력한 배타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이미 이와 유사한 논란을 경험했던 이화여대는 이화여대 학부생, 학부출신 대학원생 및 졸업생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학내 인터넷 커뮤니티의 가입 자격을 변경한바 있다.
이는 단지 소위 스카이(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라는 명문대의 학생들에게만 나타나는 태도가 아니다. 가령 중앙대 학생들 역시 학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다른 대학 출신의 편입생, 안성 캠퍼스에 다니는 학생들에 대한 비난과 비하가 연일 올라오고 있으며, 이는 서울의 많은 대학에서 나타는 현상이다. 이들은 편입생을 ‘편입충’이라고 부르곤 한다.
오늘날 이렇게도 학벌, 정확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점수에 따라 자기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학과, 단대, 학교 학생들을 대학생들이 무시하고 비하하는 이유는 그들이 특권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기득권이기 때문일까? 이들이 타인을 무시하고 기득권을 지키는데 혈안이 된 후안무치한 자들이기 때문일까? 이들은 정의감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불의한 세력일까?
그러나 이러한 차별적인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정의에 대한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 대학서열, 아니 수능점수에 따라 인간의 서열을 지정하는 젊은이들의 행태를 가로지르는 핵심에는 ‘노력’이라는 키워드가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 정의에 대한 이들의 감각은 노력이라는 것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들은 이미 중, 고등학교 때부터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새벽부터 심야까지 엄청나게 노력을 했으며, 대학에 들어가서도 취업을 하기 위해서 학점관리, 외국어 학원, 공모전 지원, 인턴경험, 취업스터디, 자기계발서 읽기 등은 물론이고 생활을 하기 위해 각종 알바를 마다하지 않고 살고 있다. 그야말로 ‘노력’도 모자라기에 ‘노오력’을 다해야하는 삶이다. ‘노오력’은 삶의 기본자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노오력’이라는 삶의 태도는 오늘날 청년들의 보수성과 연결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대학생들의 학벌에 대한 섬세한 구별의식과 다른 학생들에 대한 차별적 태도는 그들에게 정의감이 없이 특권을 옹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바로 이들의 삶의 태도로서 노력의 코드가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입시준비를 통해 신체에 새겨진 노력하는 삶은 이제 이들에게 일종의 도덕적 태도가 되었으며, 정의에 대한 감각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청년의 보수화라고 일컬어지는 현상 이면에는 바로 이 노력의 도덕, 노력의 ‘정의론’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오늘날 대학생들이 자신보다 낮은 수능 점수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을 무시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였음을 증명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행위이다. 한 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수능 점수 올리는 것은 힘들잖아요. 수능은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뭔가 객관적이고 공신력 있는 시험이죠. 12년간 교육이 집대성된 결과 아닌가요? 그 점수의 차이가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죠. 나는 수능을 잘 본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점수라도 얻기 위해 그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이 누렸던 것들을 포기한 건 분명하죠. 그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오기 위해 하루 자습시간이 평균 10시간이 넘도록 독서실에 박혀 공부만 했다니까요. 다른 친구들은 이성 친구와 사귀기도 했지만 난 고3 수능치기 전까지 이성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어요. 공부에 방해될까 봐 그랬죠. 하지만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이성 친구들과 연애를 하던 친구들은 모두 지방대, 전문대에 갔어요. 서로 수능시험에 임하는 태도가 달랐다니까요.*
이 학생에 의하면 사람의 기준을 평가하는 ‘객관적이고 공신력 있는 시험’이 바로 수능이다. 그것은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라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 높은 수능점수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명문대는 초․중․고 12년간 열심히 노력한 정당한 결과이며, 지방대나 전문대에 들어간 것 역시 그 시간 동안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다.
노력하지 않은 것은 게으르거나, 의지가 약하거나, 천성이 안 좋거나, 머리가 나빠서이다. 노력이라는 덕을 실천하지 않은 자들에게 그의 수준에 맞는 대우를 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정의이다. 오히려 중 고등학교 때 “놀 거 다 놀고, 잘 거 다 자다”가 점수가 낮은 대학에 들어갔는데 이후 편입시험을 치거나, 혹은 대학원에 들어간 학생이, “놀 거 안 놀고, 잘 거 안 자고” 수능시험을 처서 높은 점수의 대학에 들어간 학생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을 이들은 불공정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노력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같이 대우하는 불공정이자 부정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보다 낮은 입학점수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을 이들은 무시하고 그들과 자신이 다른 부류임을 주장하지만, 자기 학교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과 다른 부류임을 주장할 때 이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한다. “낮은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을 상대로 우월감을 가졌을 때는 ‘공부 안 한다, 게으르다, 머리가 나쁘다, 천박하다, 천성이 안 좋다’ 등의 말을 서슴지 않지만, 한편으로 더 높은 서열의 대학에 다니는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바로 그런 말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런 무시와 멸시 자체가 잘못됐다고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이들의 생각으로 그건 따질 수 없는 일이며 그렇게 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수능점수로 인지되는 대학서열에 대한 집착에만 국한되는 문제도 아니다. 2008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KTX 여승무원들이 파업을 하며 농성을 벌이자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 여성노동자들을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여성무원들은 철도유통소속 계약직인 걸 알고 들어갔습니다. 지금 철도송사 정직원으로 전환해달라는 것이 가장 주를 이루는 요구사항인데요.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 공사 들어가기 엄청 어렵습니다. (....) 남들 몇 년씩 어렵게 준비해서 토익 900점 넘기고 어렵게 공사 들어가는데 (......) 정직원을 넘보는 건 도둑놈 심보라고 볼 수 있죠? 노력한 만큼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승무원 여러분들은 철도공사 정직원이 되고 싶으시면 시험을 치고 정정당당하게 들어가십시오.
이 논리에 따르면 KTX 철도 여승무원들의 정규직 전환 요구는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입사하기 위해 다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공사의 정규직이 되겠다는 파렴치한 요구(“도둑놈 심보”)라 규정되고 있다. 정의롭지 못한 것은 철도공사가 아니라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비정규직 여성 철도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요지의 글들은 많은 인터넷 게시판에 게재되었고, 많은 이들이 여기에 호응했다.
대학서열에 따른 차별에서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요구 투쟁, 철거민들의 주거권 투쟁, 해고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에 대한 비난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의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보수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 즉 우경화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약자에 공감하기 보다는 그들의 고통은 그들이 노력하지 않은 대가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그 대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투쟁을 하는 것은 부당한 행위이며 불공정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특권을 바라는 심보라고 이들은 생각한다. 다시 말해 노력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부정의이다.
노력을 기본적 삶의 태도로 가진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정의감이 없는 이들이 아니라 그들을 비판하는 이들과는 다른 종류의 정의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정의감의 핵심에는 개인의 노력이 자리 잡고 있다. 노력의 대가에 승복하라는 보수화된 청년들의 요구는 “동등한 자를 동등하게 대하고 동등하지 않은 자를 동등하지 않게 대하는 것이 정의”라는 고대 그리스적 정의론의 신자유주의적 판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몫을 나누는 것과 관련된 분배적 정의에 대해 논의하면서 싸움과 불평이 생기는 이유에 관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당사자들이 동등함에도 동등하지 않은 몫을, 혹은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분배받아 갖게 되면, 바로 거기서 싸움과 불평이 생겨난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 어떤 성원들은 보다 많은 몫을 분배받을 자격이 있고, 어떤 성원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 같은 자격을 가진 자들끼리는 같은 몫을 분배받아야 하며, 자격이 없는 자들은 자격이 있는 자들만큼의 몫을 분배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분배적 정의이다. 오늘날 보수화되고, 우경화된 청년들에게 그 자격이라는 것이 바로 ‘노력’이다. 노력을 한 자들이 받아야 할 몫과 노력하지 않은 자들이 받아야 할 몫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보수화된 청년들이 정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각’이다.
*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 강조는 인용자
** <조선일보>, “"너, 학부 서울대 아니지? 그럼 나가", 2015년 9월 3일
덧붙임
정정훈 님은 수유너머N 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