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님은 어떤 가르침을 주십니까?”
동자승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손가락을 하나 펴 보였다.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구지선사가 돌아오자 동자승은 손님이 찾아왔었다고 말했다.
“손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스님께서 어떤 가르침을 주시는지 물었습니다.”
“그래. 너는 어떻게 답하였느냐?”
동자승은 그 때처럼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러자 구지선사는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냈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자승의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승은 손가락을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아픔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구지선사는 동자승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동자승이 이를 보고 이전처럼 자신도 손가락을 펴 보이려 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손가락은 잘려 있었다. 동자승은 크게 깨달았다.
나는 3학년 2반 7번 애벌레
『나는 3학년 2반 7번 애벌레』 (김원아 글, 이주희 그림/창비)는 교실에서 태어난 애벌레들의 이야기다. 애벌레들은 나비가 될 날을 꿈꾸며 부지런히 잎을 먹으며 살아간다. 일곱 번 째로 태어난 7번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과는 조금 달랐다. 잎을 갉아 이런 저런 무늬를 만들 줄 알았고 교실에서 함께 지내는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손에 다치기도 하고, 농약이 뭍은 잎으로 곤혹을 겪기도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모두 이겨낸 7번 애벌레는 결국 하얀 나비가 되어 창밖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글쓴이는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배추흰나비 애벌레를 키웠다고 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작은 생명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그래도 나중에 나비가 되면 구름처럼 하늘을 둥둥 떠다닐 거야.”
이야기의 바탕은 애벌레의 생애이다. 아이들과 애벌레는 서로를 바라보며 성장한다. 나와 다른 존재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쓰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2번 형님 말이 맞아. 인간들을 조심해야 해.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상처만 남아. 인간들은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나 봐. 중요한 건 그저 자신들의 호기심뿐인 것 같아.”
이야기 곳곳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몰염치를 말하고 있다.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애벌레를 만지려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배려와 존중 없이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꼬집는다. 또 작고 약한 것에 대하여 서로의 처지와 상황을 돌아볼 수 있는 역지사지의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가위표를 만들기로 했어. 배춧잎에 가위표가 새겨지면 나쁜 배춧잎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아이들에게 농약이 뭍은 배춧잎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7번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과 함께 X표시를 만든다. 한없이 작고 약한 애벌레지만, 7번 애벌레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스스로 주어진 환경을 바꾸어 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성찰이 없음에 대한 가벼움
이 글은 글쓴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이야기다. 작은 동물을 키워 본 아이들이 쉬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이고, 글쓴이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뚜렷하지만 이 이야기는 허탈하기만 하다. 재미가 없다. 그 이유는 좀 더 깊은 성찰이 보이지 않음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동자승은 손가락이 잘린 뒤 더 이상 손가락을 세울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더 이상 스승과 같이 손가락을 세울 수 없다. 바로 그 곳에서 깨달음이 시작되었다. 구지선사는 동자승의 손가락을 끊음으로써 스스로의 깨달음과 성찰이 없이 행하는 것은 허망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손가락이 없는 동자승은 이제 자신만의 깨달음을 찾을 것이다. 거짓된 것을 내려놓고 참으로 자신의 것을 품으려 애쓸 것이다. 더 이상 스승을 흉내 내지 않고.
성찰이란 자신을 반성하고 깊이 살피는 일이다. 손가락을 끊는 아픔, 무지를 드러냈을 때의 부끄러움이 계기가 되어야한다. 자신을 오롯이 바라보고 익숙한 것들에 의문을 던졌을 때 성찰은 시작된다. 이는 결코 가볍지도, 쉽지도 않은 일이다. 성찰을 통해서만이 다른 이와 소통했을 때 더 큰 설득으로 다가갈 수 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들이 동감을 얻을 수 있고 또 감동을 전할 수 있다.
글쓴이는 ‘작은 것들을 사랑하고 배려해야 한다.’, ‘자연에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 따위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생각들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야기에는 왜 그러해야 하는가, 왜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 글쓴이 나름의 고민과 생각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그런 거야’하는 허탈함과 지루함이 온다.
애벌레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린다. 애벌레들은 모두 똑같은 생김새를 가졌고 종일 먹이를 먹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저 나비가 될 날을 기다리는 개성이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잎에 무늬를 만들어내는 7번 애벌레에게 좀 더 특별함을 주기 위해 번호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학교라는 공간에서 번호로 불리는 우리의 아이들, 학교라는 작은 공간에서 서로의 개성을 숨긴 채 같은 지식을 머릿속에 채워나가는 우리 아이들을 빗댄 것일까.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7번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과 같이 자신의 특별함을 내려놓는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은 의심과 두려움으로 바뀌고, 잎에 무늬를 만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는 나비가 되어야 하는 부담에 흐릿해진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설명할 수 있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그저 한 마리의 나비가 된다. 그 곳에 존재에 대한 고민을 담지는 못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삶에 대한 호기심보다 삶의 안정감과 편안함을 우선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면 ‘원래 그러한 것들’이 많아진다. 자신의 삶에서 쉬이 공감하지 못하면서 정작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하지만 그럴싸하고 그러하게 자리 잡은 생각 말이다. 자신의 삶에서 깊이 고민하지 않고 삶에서 당연하게 행하지 않으면 이러한 것들은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이 어설픈 생각과 태도를 아이들에게 당연하게 가르치고 싶어 하는 것에서 문제가 된다. 어른들이 대충 그럴싸하게 넘어가고 싶은 순간, 아이들은 “왜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가슴이 뜨끔해 지는 순간이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러는구나. 몇 마리 더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니?”
“관찰하라고 여기 둔 거잖아요. 자세히 보고 싶어서 그래요. 아주 살짝 만지려고 했어요.”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어.
“사람이 살짝이라도 만지면 애벌레는 죽을 수도 있어. 생각해 봐, 너보다 큰 외계인이 너를 만지다가 네 다리가 부러지면 얼마나 아플까? 한 번만 애벌레 입장에서 생각해 봐.”
“혼자 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사람이 벌레 입장을 어떻게 생각해요!”
호기심에 애벌레를 만지려던 아이가 선생님에게 그 장면을 들키고 말았다. 선생님의 당황스러움이 느껴진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상황이다. 언제나 조금 더 지혜롭게 답하지 못해 아쉬운 순간이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어떤 대화가 오갈지 궁금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싱겁게 상황이 마무리 되었다. 선생님과 아이와의 뻔한 대화가 참 아쉽다.
애벌레를 기르고 관찰하는 것에 대한 의미가 교사 자신에게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듯 보인다. 몇 번이고 애벌레를 작은 틀 안에 가두어 관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교육과정에 그 것이 담겨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살아있는 것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면 이것에 대한 진지한 숙고가 필요하다. 이는 중요한 순간을 슬쩍 넘어간 것이다. 선생님과 아이들만의 성찰과 철학이 담겨있지 않아 아쉽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 삶의 대부분이 다른 존재와 얽혀 있으며, 많은 시간과 힘을 관계를 위해 쏟는다. 내 옆에 있는 존재와 관계하고 있음을 확인하며 안정을 얻는다. 아이들은 동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관계맺음을 경험한다. 나와 연이 없던 존재와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다. 저 멀리 배추밭에서 사는 애벌레와 교실 뒤에 있는 애벌레는 결코 같은 애벌레가 아니다. 매일매일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먹이를 살뜰히 챙겨주게 되면 이미 애벌레는 나와 감정을 주고받는 벗이 된다. 이때에 그저 과학책에 단계별로 그려진 애벌레의 생애는 또 하나의 귀한 삶으로 인식되어 다가온다. 이러한 경험과 성찰을 통해 다른 존재와 공감하고 그의 입장에서 행동하게 되며, 나와의 닮음과 다름을 알게 된다.
글쓴이도 애벌레를 키우며 보인 아이들의 성장이 계기가 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글에는 애벌레와 아이들의 관계맺음에 있어 특별함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관찰자로 애벌레는 관찰의 대상으로만 만나게 된다. 서로가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만나게 되는 특별함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특별함을 그려내지 못한 글쓴이의 상상력이 아쉽다.
그러한 것을 그러하게
성찰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얻는다. 어려서부터 학습을 통해 얻기도 하고, 내가 인정한 사람의 삶과 태도를 동경하며 얻기도 한다. 이렇게 얻은 지식들이 삶속에서 지혜로 발현하고 이 지혜가 당연하게 행동으로 옮겨지려면 바로 ‘성찰’이 필요하다. 이 성찰의 과정을 지나지 않으면 그저 그럴싸한 말들을 얼버무리고, 어렴풋한 행동들을 어설프게 흉내 내게 된다.
또 성찰은 내 삶을 스스로 돌아보고 내게 주어진 지식들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골똘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게 필요치 않은 것은 단호하게 내려놓고, 내게 필요하다 여겨지는 것은 과감하게 끌어안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쳤을 때야만 단순하고 명료한 신념과 태도가 나온다. 이러한 신념과 태도는 나 스스로를 설명할 때 자신감을 가져온다. 또 다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설득과 신뢰를 줄 수 있다.
어른이 아이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음을, 이러한 가치와 태도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일러주고 설득하기 위함이다. 아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싶다면, 아이들과 함께 공감하고 싶다면,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주고 싶다면 어른 스스로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그 안에 의미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삶을 통해 경험하고, 고민하고, 성찰한 것들을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어설프지 않게.
덧붙임
김인호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