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란을 써야 하거나,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군가 물어볼 때 곤혹스럽다. ‘인권활동가’로 정체화하며 살아가지만, 직업이 신원의 보증처럼 요구될 때는 안정적인 일로 여겨질 것 같지 않아 난감하다. 인권단체에서 일한다고 하면 ‘좋은 일 한다’는 얘기를 듣곤 하는데, 인권활동이 ‘좋은 일’로 표현되는 게 불편하다. 2019년 한 해 동안 인권활동가들이 함께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한 활동가 실태조사’를 진행했고, 결과 보고회가 얼마 전 열렸다. 이 과정에 함께 하면서 내가 느꼈던 곤혹스러움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됐다.
‘좋은’ 일이지만 열악한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한 활동가 조사’는 2015년 ‘인권활동가 활동비 처우 및 생활실태 조사’에 이어 진행된 것이었다. 2015년 조사 결과는 ‘인권 없고 인간다운 삶 못사는 인권활동가’로 회자됐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활동비가 열악한 활동조건을 압축해 보여주는 숫자로 표현됐다. 열악함만 강조된 당시 조사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경제적인 조건은 중요하지만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활동의 지속 여부가 결정되는 건 아니다. 활동하며 부딪히는 어려움, 계속할 수 있을지 막막함을 갖게 하는 여러 이유들이 이번 조사를 통해 살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번에는 ‘활동비 처우’만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한 조건을 다양하게 살피고자 했다. 하지만 이번 조사 결과가 주목되는 방식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좋은 일 하는데 열악하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가라는 ‘직업정보’에 대해 한 진로/진학정보 사이트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단체의 목적이나 방향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한다. 각종 회의, 프로그램 진행, 현장 조사 및 상담 등으로 외근, 야근이 잦다. 한 사람이 맡는 일이 많아 노동강도가 센 편이다. 임금 수준이 낮은 편이고 복지 혜택도 약하다. 이를 보완하며 휴가 등 복지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추세다. 조직문화는 상대적으로 민주적이며 수평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다.” 업무환경이 열악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왜곡된 정보라고 할 수도 없다. 많은 활동가들이 처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단체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고 한국사회의 변화를 추동해내면서 직업정보에 시민단체 활동가가 소개되고 조금이나마 사회적 인정을 받고 있다. 활동가들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며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연구나 제도적 방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중간지원조직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과 논의는 ‘좋은 일 하는데 열악하다’는 진단과 ‘처우 개선과 공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제안으로 요약되는 것 같다.
운동의 독립성과 보편적인 사회보장의 권리
인권활동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난감할 때 ‘좋은 일’만큼 단순하고 간편한 표현도 없겠지만, 이는 복잡한 감정을 불러오는 말이기도 하다. 누군가 해줘서 고맙지만 나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선을 긋거나,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니만큼 활동가들의 헌신과 희생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일’이란 말로 가려져 온 활동가들의 ‘노동’에 대한 고민과 이야기가 들려지는 것은 반갑다. 하지만 그 대안이 활동가들의 처우 개선과 이를 위한 공적 지원으로만 접근될 수는 없다.
“회사처럼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개념이 아니라 자기 활동을 하려고 오는 거잖아요. 조직과 개인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단체 재정을 늘리려면 곧 내 수입을 내가 늘릴 방안을 찾아야 하는 거죠.”
이번 조사에서 근로계약서 작성 여부에 대해 작성하지 않는다고 답한 단체들이 남긴 이유였다. 조직을 구성하는 활동가들의 관계를 고용관계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인권단체가 비등록 임의단체로 운영된다. 규모가 작아서이기도 하지만, 법인격을 갖출 때 혜택만큼 요구받는 것도 많다 보니 운동의 독립성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정부와 자본이라는 권력에 영향받지 않고 눈치 보지 않는 운동을 위해 대부분의 단체들은 개인 회비나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활동비로 대표되는 활동가의 처우는 근본적으로 인권운동에 대한 사회적 지지와 연대에 달려있다. 이는 인권운동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운동이 회원 확대를 통해 운동의 지속가능성과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해온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정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운동의 지속가능성은 운동의 성장과 발전의 문제이지 공적 지원을 늘리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잖아요. 그래도 최저임금 기준에 맞추면서 올해 활동비가 늘었는데 그 정도 되니까 어떤 것들을 해볼 수 있겠다는 계획을 세워볼 수 있더라고요.”
많은 활동가들이 주어진 활동비에 맞춰 덜 쓰면서 생활하거나, 생계를 위해 별도의 일을 함께하며 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조건에서 개인들의 지지와 후원은 단체의 운영을 더 탄탄히 하고 활동가들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활동비가 당연했던 조건이 달라져 활동비 액수가 높아지는 것은 오늘의 모습과 내일에 대한 기대를 달라지게 하기에 중요하다. 그러나 더 나은 활동 조건이 활동비 인상만을 향하지는 않는다.
“월세를 내야 된다거나 아이를 키워야 된다거나 가족 중 누군가 아프다거나 이런 상황이라면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 활동하기는 어렵겠죠.”
유일한 사회보장제도인 4대 보험은 기업을 중심으로 한 고용관계로 제한되어 있고, 그 보장수준 역시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미약하다. 기본적인 제도라면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지만, 인권활동가들을 포함해 고용관계라는 범주 바깥에서 불안정하게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제된다. 각자의 수입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사회가 아닌 의료, 주거, 교육과 같은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는 사회라면 어떨까. 보편적인 사회보장의 권리가 보장될 때 인권활동가들의 활동 조건도 더 탄탄해질 수 있다. 인권운동만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로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평등하고 안전한 관계와 조직
설문조사에 참여한 활동가들의 76%가 5년 뒤에도 인권활동을 지속하고 싶다고 답변했다. 인권운동이 지속가능하기 위해 갖춰져야 할 조건을 물으니 ‘서로에게 힘이 되는 동료관계’와 ‘평등하고 민주적인 조직운영’이 많이 꼽혔다.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소통하는가는 열악한 활동조건을 딛는 힘이고, 앞으로도 인권활동을 지속하고 싶은 이유가 된다.
이러한 조사 결과가 가지는 의미도 더 많이 곱씹어지길 바란다. 직장에 출근할 때는 영혼을 놓고 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부분의 직장은 직책을 비롯해 다양한 차별 기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상명하복의 수직적 위계구조다. 인권단체는 이와는 다른 구조와 관계를 지향하며 조직의 운영 원칙을 정한다. 민주적인 조직문화에 대한 고민을 쌓는 시간들도 이어져 왔다. 조직을 사유화하거나 대표 중심의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단체 운영이 문제로 제기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해당 단체를 넘어 운동사회 안에서 함께 고민을 나누고 대응하는 경험을 만들어오기도 했다.
수평적인 관계,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와 더불어 소수자 정체성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안전함처럼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은 활동하는 데 있어 너무도 중요하다. 누구라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평등하고 안전한 관계 속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라지 않을까. 인권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구성원 모두 행복하게 활동하고 있는지’ 함께 일하는 동료를 살피며 일상의 관계와 문화를 지속적으로 점검해나가야 한다는 과제를 확인했다. 인권운동을 넘어 모두에게 평등하고 안전한 일터여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제안으로 확장되길 바란다.
인권운동만의 지속가능성을 넘어
내가 느꼈던 곤혹스러움은 인권활동가여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의미 있는 노동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누구나 겪는 것이기도 하다. 인권활동가들이 처한 어려움이 아니라 인권활동가를 포함해 불안정한 노동이 곧 삶의 불안정으로 이어지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으로 어떤 대안을 만들어 가면 좋을지 함께 고민해가면 좋겠다. 더불어 인권단체뿐만 아니라 일하는 사람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변화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