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 이후 ‘긴급한 재난 상황’이라는 인식 아래 강력한 방역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인권의 원칙을 외치는 목소리는 마치 방역과 안전을 해치려는 시도처럼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해치는 정책을 펼쳐나갈 때, 이 사회는 시민의 안전도 권리도 제대로 보장할 수 없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20여개 인권단체들이 ‘코로나19 인권대응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로 모여 <코로나19와 인권 -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위한 사회적 가이드라인>을 작성, 6월 11일 보고회를 진행했습니다.
보고회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진행되었습니다. 1부에서는 ‘국가의 책무와 유예된 권리들을 중심으로’ 격리 및 강제적 행정조치, 평화적 집회 자유에 대한 권리, 정보인권, 언론의 사회적 의무를 발표했으며, 2부에서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와 사회적 제안’이라는 제목으로 장애인, 어린이·청소년, 수용자가 겪는 코로나19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당일 현장에는 사전에 신청한 50여명의 참가자가 모였고, 페이스북 라이브 생중계도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홍보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전 신청이 금세 마감되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라이브 생중계에 참여하는 걸 보며,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시대의 인권을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가의 책무와 유예된 권리들
정부와 지자체는 방역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과도한 개인 동선 추적과 공개, 안심밴드를 포함한 자가 격리 대상자 감시, 자가 격리 지침 위반자에 대한 처벌, 기지국 수사와 같은 행정조치를 시행했습니다. 방역 당국은 코로나19 종식 시점이 되면 수집한 정보를 파기하겠다고 말했지만, 정작 종식 시점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안심밴드 부착과 지침 위반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조치는 마치 자가 격리 대상자에게 바이러스 확산의 모든 책임이 있다는 식의 인식을 확산하며, 서로에 대한 의심과 혐오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아왔습니다. 위급한 상황일수록 더욱 고려해야 할 인권의 원칙들을 살피고, 현재 진행 중인 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국가는 당연히 시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책무는 그저 확진자와 감염 의심자를 잘 색출하고 격리해내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책무는 확진자와 감염 의심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지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며, 만일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기본권의 제한이 필요하다면 어떤 시스템을 도입하며 부작용은 어떻게 막아야 할지를 충분히 논의해야 합니다. 2015년 메르스 당시 수집한 개인정보도 아직까지 파기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난 지금, 수집한 개인정보의 파기 기준을 마련하는 일 역시 시급합니다. “방역을 위해서라면 시민의 권리를 잠시 접어둘 수 있는”게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역”을 고민해야 합니다.
사회적 소수자가 겪는 코로나19
흔히 바이러스와 그에 따른 질병은 평등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로 인한 영향과 위기는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습니다. 폐쇄 병동과 장애인 시설은 집단 감염 끝에 코호트 격리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파도 잠시 멈추거나 쉬어갈 수 없는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감염의 위협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모든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배당할 때조차 이주민은 그 ‘모든 시민’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불안정 노동자, 이주민, 난민, 홈리스, 기저질환자, 아동 등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더욱 큰 타격을 받거나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마주한 위기는 코로나19 때문에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원래부터 존재하던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드러난 데 가깝습니다. 학교와 돌봄 시설들이 문을 닫게 되자 원래부터 돌봄 책임을 떠안아왔던 여성들이 그 부담을 온전히 지게 되거나, 시민권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온 이주민과 난민, 홈리스들이 건강권과 사회보장권을 박탈당하는 현실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응 역시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바꿔야만 합니다. 코로나19 대책이 향해야 할 방향입니다.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이정표로 삼자
많은 인권단체들이 코로나19 대응 활동에 어려움을 느껴왔습니다. 방역 지침으로 인해 구체적 활동이 축소되는 문제뿐 아니라, 코로나 시대에 인권의 언어가 힘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인권단체들은 네트워크로 함께 모여서 우리의 원칙을 정리하고 나아갈 방향을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의 고민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은 난감하고 어려웠지만, 힘이 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특정한 이슈에 대해 다양한 인권단체가 모여 협업하는 경험은 416 세월호참사 이후로 오랜만이었다는 점에서, 추후에도 함께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남겼다는 의미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이드라인 논의와 집필에 역량을 쏟느라 발표회 준비는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되었고, 보고서 분량이 예상보다 늘어나면서 제작비 역시 늘어났습니다. 애초 계획했던 활동이 아니라 급작스럽게 추진된 활동인 만큼 재정 마련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인권재단 사람의 <인권활동119> 기금을 통해서 보고서 제작과 보고회를 잘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긴급한 활동을 지원하는 기금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바이러스로 인한 위기가 반복될 것이라는 예측되는 지금, 가이드라인에 담았던 문제의식을 더욱 널리 공유하는 과제가 남았습니다. 네트워크는 앞으로 가이드라인의 내용을 알리기 위한 연속 기고와 카드뉴스 제작, 현재 진행 중인 방역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지자체 및 질병관리본부와의 면담, 감염병예방법을 포함한 법제도 개정 논의, 가이드라인 번역 및 UN 제출 등의 활동을 추진하려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드러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국가 권력의 책무를 제대로 묻기 위한 고민과 토론은 계속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위한 원칙이 그 길 위에서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