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
시 쓰고 공부하고 움직이는 사람, 희음입니다. 이게 요즘 제가 저를 소개할 때 즐겨 쓰는 문장이에요. 가장 크게 방점을 찍고 싶은 부분은 ‘움직이는 사람’인데요, 문학이든 공부든 그것이 삶과 사회를 성찰하면서 더 나은 방향을 만들어갈 때에라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방향을 따라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최근에는 첫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를 2020년 가을에 펴냈고, 앤솔러지 시집 『구두를 신고 불을 지폈다』를 출간했습니다. 일상비평 웹진 ‘쪽’(zzok.co.kr)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근 내신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가 나오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데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사랑방 후원인들에게도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2016년에 한 문예지에서 등단을 했어요. 통상 등단한 지 4년 이상이 되면 시집을 묶어서 내려는 노력을 하죠. 대개는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은데, 제 경우 운 좋게 작년 초에 시집 계약을 하게 됐어요. 등단하기 전부터 올 초까지 썼던 시를 묶어 시집에 실었으니 거의 7년 치의 시가 실려 있다고 보면 돼요.
시집 첫 머리에 있는 ‘시인의 말’을 옮겨 보면 이렇거든요. “글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서 계속 해봤습니다. 계속하다 보니까 목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뒤에는 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최근까지 이어져온 제 나름의 시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거나 혹은 들으려 노력하는 것이 시 쓰기의 윤리라는 생각. 그 목소리는 사회적 소수자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말과 울음 그 사이에 있는 언어화되지 못한 정서들일 수도 있을 테죠. 어쨌든 그 모든 건 지금-여기를 함께 살아가는, 즉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 땅에 함께 거주할 자격을 얻는 ‘사람’의 말인 건데, 이 세계의 규범 언어는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끝없이 그어대고 있잖아요. 그 은폐된 선들을 드러내거나 흐트러뜨리면서 목소리들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게 저의 문학하기의 지향이고, 이 시집이 바라보는 방향이기도 해요.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그게 잘 되었는지에 대한 최종적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하고요.
시라는 형식은 굉장히 친숙하고도 (학창시절 내내 접한 효과) 동시에 어렵게 느껴지기도 해요. 마치 추상화를 보는 것 처럼요. 그래서 시를 음미한다 혹은 시를 읽고 해석한다는 건 어떤 걸까, 전적으로 시를 읽는 사람에게 맡겨지는 걸까라는 질문이 들 때가 있어요. 좀 어리석은 질문이기도 한데, 시를 읽는 방법이라는 게 있을까요?
사람들이 시를 어렵다고 느끼는 건 그게 정말 어려워서가 아니라 낯설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질문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학창시절 내내 접한 효과’로서 시가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는 말 속에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는 셈이죠. 그러니까 시가 어렵다는 선입견이 시를 더 밀어내게 만들고, 그렇게 시를 자꾸 멀리하게 되면 시와 친해지거나 시라는 장르에 익숙해질 기회는 더 드물어지게 돼요. 일단 시를 가까이에 두고,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하려 할 필요 없이 되풀이해 읽으면서 느끼려고만 하면 돼요. 글자를 보기보단 오히려 그림을 보는 것에 가까운 태도로요. 그러면 어느 순간 어떤 단어라든지, 어떤 문장이 하나의 시 속에서 ‘매직아이’처럼 입체적으로 솟아오르는 걸 느끼게 될지도 몰라요.
하나의 시를 어떤 의미로 해석하느냐 하는 건 전적으로 독자의 마음에 달려 있어요. 정답은 없어요. 그야말로 무한히 열린 텍스트라고 할 수 있죠. 100개의 통로가 있는 하나의 미로라고 보면 돼요. 그 중 어떤 출구를 찾아서 가느냐에 따라 독자의 기쁨은 각각 다른 모양이 될 거예요. 다만 각각의 시 안에 담긴 것이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만 기억하고 시를 읽는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떤 사회/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요?
우선 당장 오는 12월에 있을 낙태죄 폐지에 관한 법률 개정에 가장 크게 관심이 가는데요, 10월 7일 정부가 발표한 형법·모자보건법 개정 입법예고안은 낙태죄 처벌 기준을 세분화하고 임신 행위를 죄로 규정할 가능성을 남겨두는, 새로운 ‘낙태죄’ 법안에 다름 아니잖아요. 이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는 최근 국민동의청원 달성을 통해서도 드러나긴 했지만, 지금까지의 문재인 정부의 행보로 봐선 안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인 듯해요. 이 정부와 국가가 여성을 무엇으로 여기는지가 12월에 판명될 것이라 봅니다.
또 하나는 코로나 정국이 지속되면서 사회의 약한 고리가 우수수 파열되는 일들에 대한 우려입니다. 특히 노동 문제와 관련해서요. 여기서 코로나 정국이라는 건 원인이 아니라 하나의 계기겠죠. 그간 노동구조의 열악함이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은폐되어 있었는데, 코로나가 그 베일을 젖히는 손이 되어준 것일 뿐인 거라는 거죠. 택배노동자들의 잇따른 과로사와 자살은 국가가 노동환경 감독에 대한 책임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코로나 정국이라는 비상사태가 이리 오래 지속되는 중에도 정부가 노동의 예외적 패턴에 대응하려는 비상대비책 마련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다는 걸 보여주잖아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지금 정부는 자신의 존재 가치부터 의심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요.
시인이라는 정체성 외에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정체화하셨는데요. 페미니즘 책모임도 꾸준히 하고 계시잖아요. 공부를 혼자도 하시겠지만, 꾸준히 누군가와 함께 하려고 노력하시는 게 엿보이는 것 같아요. 마치 공부를 어떤 운동을 실천하듯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희음 님께 지금 하고 있는 여러 공부는 어떤 의미인가요?
그 전에도 독서 모임은 꾸준히 해 왔지만, 제가 본격적으로 세미나 형식으로 공부 모임을 꾸리기 시작한 게 시로 등단하던 2016년부터예요.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미학이론,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최전방에 있는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함께 읽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사실 제 스스로에게 어떤 강제를 만들어주려는 목적에서 세미나를 구성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를 하려면 텍스트를 더 꼼꼼히 읽어야 하잖아요? 깊이 있는 공부에 대한 옅은 의지를 세미나라는 형식을 통해 조금 짙고 강하게 만들어보자는 시도였던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함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잘 갈무리된 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라, 함께 둘러앉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사람의 생각이 보이는 거예요.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텍스트 안에 있는 지식 역시 딱딱하게 물화된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경유한 팔팔하게 살아 움직이는 지혜 같은 게 되더라고요. 우리가 거쳐 온 지난 시간들을 철학의 언어로 재해석하면서 그것을 현재의 지팡이로 삼게 되는 거죠. 각자의 삶이 조금씩 다른 경우, 혹은 자신의 삶을 읽어내기 어려운 경우에는 서로 서로 그 삶들을 대신 언어화해주거나 힌트를 던져주기도 해요. 혼자 공부할 때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는 셈이죠. 함께 공부하고 세미나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어가며 더 부드럽고 강한 우리가 되어간다는 점에서, 우리의 공부 역시 사회를 더 낫게 만드는 운동과 실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지금 한창 사랑방에선 ‘빠듯하지만 뿌듯하게, 사랑방 후원인 하기’라는 모집사업을 하고 있어요. 희음 님께서는 어떤 빠듯함 속에서 사랑방 후원을 통해 어떤 뿌듯함을 느끼고 계신가요?
인권단체 후원은 사랑방이 유일합니다. 페미니즘 단체나 환경운동 단체, 장애인 단체 후원은 누가 권하지 않아도 오래 전부터 자연스러운 힘에 이끌려서 하게 됐는데, 사랑방 후원은 가원님의 권유가 계기가 되었어요. 그런데 후원을 하다 보니, 내가 왜 더 빠르게 후원할 생각을 하지 못했나, 스스로 이끌리지 못했나 하는 자책이 들더라고요.
후원하는 곳 중 사랑방을 제외한 단체들이 요즘 어떤 활동에 주력하는지를 알아보려고 하면 굳이 어떤 수고를 들여 애써 찾아봐야만 하거든요. 그런데 사랑방은 매주 가장 현재적이고 일상적인 이슈에 대해 <인권으로 읽는 세상>을 통해 논평을 내놓으시잖아요. 잊을 만하면 논평이 나오고 또 잊을 만하면 새로운 논평이 도착해 있죠. 활동가들이 공부하고 토론하고 발품과 손품을 팔아 매주 내놓는 논평들은 때로는 차갑게 머리를 채워주고, 또 때로는 넘치도록 뜨거워 당장 광장으로 달려 나가고 싶게 만듭니다. 가끔은 그 언어들을 건너뛰거나 읽는 데 게으름을 부리기도 하지만, 사랑방을 후원해온 시간 동안 알게 모르게 제 안에 인권에 관한 언어와 감수성이 더 안정적으로 정착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뿌듯함을 사랑방 말고 또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사랑방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이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옛집에서 사랑방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가는 방이었잖아요. 편하게 머물러 밥도 나눠 먹고 잠도 자고 가고. 안채와는 거리 유지를 하면서, 누구나 와서 허물없이 ‘사이’의 일상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한 공간. 이 곳 사랑방이 그런 곳인 듯해요.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언어를 밥처럼 차려놓아 생각을 나누게 하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자라게 하는 공간. 그런 사랑방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내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길 바랄게요. 그리고 곁을 지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