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추적단 불꽃’을 통해 알려진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후 국회 국민동의청원 첫 번째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 대한 수사와 처벌한 요구가 10만 명을 달성했고, 가담자 신상 공개에 대한 청와대 청원은 200만을 넘기며 사회적 공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 제대로 대응하지 않아 온 공권력의 변화도 엿볼 수 있고, 성폭력처벌법, 아동청소년보호법 등 잇따른 법 개정과 양형기준 마련 등으로 처벌도 강화되었습니다. 분명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이전보다 높아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박수만 치고 있기에는 뭔가 충분하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어떤 고민을 더 이어가야 할지 함께 이야기 나눠봐야겠다는 마음으로 2020 인권운동사랑방 반성폭력 교육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반성폭력교육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김혜정 활동가님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1년 동안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디지털 성폭력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근하게 짚어주시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였습니다.
피해자의 자리를 삭제시킨 사회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만큼 이 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이 전혀 마련되어있지 않다는 사실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폭행, 협박을 성폭력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 기존 제도에 기대서는 디지털 성폭력의 양상에 대한 대처 준비가 전혀 될 수 없는 것이죠. 여기에 더해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성폭력이 발생하게 되는 구조는 무엇인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범죄에 가담하고 있는지, 그래서 피해자는 어떤 피해를 겪으며, 이후에도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는지 아직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이지요. 그럴수록 중요한 것은 이 폭력의 피해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피해자들은 2018년부터 이미 영상물 제작과 전송에 대한 강요, 유포 협박, 개인정보 불법 취득 등에 대해서 경찰에 신고하며 문제를 제기해왔습니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텔레그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던 것이죠. 이는 이후 사회적으로 텔레그램 n번방이라는 사건이 공론화된 이후 경찰의 태도에서도 확인 할 수 있었는데요. 피해자는 중요하지 않고, 살인죄도 피해자가 이미 사망한 경우라도 가해자를 입건, 조사, 처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피해자의 자리를 지워버리는 것이지요. 언론 또한 수량으로 드러나는 피해에 대해서 선정적 보도를 이어가기에 바빴습니다.
디지털 성폭력에 함께 대응하는 과정
그런 와중에도 피해자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말하며 디지털 성폭력에 대응하는 여성들이 모이고, 여러 단체가 결합해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가 꾸려진 것입니다. 김혜정 활동가님은 공대위 활동을 직접 참여하시면서 디지털 성폭력에도 기존 성폭력 대응 활동의 역량이 연결되고 이어질 필요를 느끼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불법촬영이나 딥페이크라고 부르는 합성 기술들을 이용한 디지털 성폭력 역시, 기존 성폭력의 발생 양상과 마찬가지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여성에 대한 착취구조가 다르지 않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역량을 모아서 대응해나가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김혜정 활동가님도 여전히 피해자의 말하기와 관련해서는 고민이라는 말씀도 해주셨는데요. 과거에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부끄러운 일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의 피해를 드러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강조해왔지만 디지털 성폭력은 이 고민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피해의 양상이 물리적인 폭력의 순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파일의 형태로 여전히 온라인 세계에 존재하고 사소한 정보로 피해자가 특정하기 때문에 피해가 지속되는 것이지요. 그런 와중에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재판에 언급되면 다시 기사화되거나 온라인에서 주목받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에 신중에 다시 신중이 기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대응의 과정에서 피해자의 존재를 지우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계시다는 이야기까지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시작
무엇보다도 마음에 남는 이야기는 피해당사자들을 지원하는 과정을 통해 짐작하게 되는 디지털 성폭력이 남기는 피해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피해자가 자신에 대해 검색하면서 괴로움의 시간으로 빠져드는 주기가 10분이었다면, 이것을 1시간으로, 하룻밤으로, 1주일로 점점 간극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조력, 지원한다는 이야기였는데요. 김혜정 활동가님이 강의를 하시면서 디지털 성폭력 문제에 대한 대응은 이제 시작이라는 말씀도 해주셨는데요. 지금도 이어지는 피해자의 시간을 혼자 가늠하게 되면서 ‘이제 시작’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이 사회의 응답을 받아내는 일이 이제 시작되어서 언제 제대로 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답답함도 조금 생기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이 응답 제대로 받아내기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들이 지금이라도 함께 궁리하고 이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말입니다. 2021년에는 인권운동도 사랑방도 작게라도 함께 그 변화를 만들고 변화의 의미를 나누는 반성폭력교육이 이어지길 기대하며 이 글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