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4일 저녁,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제안한 줌(zoom) 화상회의에 130여 명이 넘는 전국의 활동가들이 모였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시국이다”라는 이름의 시국회의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함께 하게 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차별금지법 제정이 차일피일 미뤄져 왔던 게 하루 이틀 새 일도 아닌데, 왜 다시금 ‘차별금지법 제정’이 이토록 우리의 삶에 당면한 문제로 성큼 다가오게 되었을까.
‘뭐라도 좋으니 모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시국회의에 참여한 누군가가 남긴 메시지에서 130여 명의 사람들이 가졌을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故 변희수 하사의 죽음 이후 누군가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없던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함께 약속했던 변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지를 혼자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시국회의에 모인 거라는 생각이 든다. 故 변희수 하사가 군 내 복직을 위한 싸움과 동시에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싸움에 용기를 내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미래를 앞당기는 것으로 그 용기에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의 삶,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지금 여기’ 우리의 삶으로 차별금지법을 가져오는 것, 시국회의에서 사람들이 3시간 동안 함께 머리를 맞댄 이유이다.
사회적 흐름을 만들고 국회를 움직이자
시국회의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목표는 크게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제정을 위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나고 모일 수 있는 구체적인 거점과 계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국회가 차별금지법 '발의-상임위 논의-본회의 상정-표결'이라는 절차를 밟아나가도록 사회적 흐름을 만든다는 것으로 제안되었다. 그리고 10여명이 각각의 온라인 소모임 형태로 모여 앞으로 해 나갈 구체적인 활동들과 차별금지법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모을 방법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각 소모임별로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지만, 공통적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에 책임을 져야 할 국회를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주요하게 이야기되었다. 특히 보궐선거를 앞둔 시점에 거대 양당이 중요한 사회적 논의들을 거의 다루지 않고 있고, 하반기로 갈수록 또 다시 2022년 대선 국면을 핑계로 대며 차별금지법을 입 밖에도 꺼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의 제정 지형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역시 4월부터 투쟁의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이는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던 국회가 나서게 하는 것 역시 사회적 흐름을 조직하는 운동의 역량을 어떻게 키우고 확산시킬 것인지에 달려있다. 국회 앞 거점에서 4월부터 매주 목요일에 모여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목요행동’과 온라인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모이는 ‘만인선언’이 그 시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모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적 흐름’을 만들어가는 운동이 국회 앞 거점이나 국회가 위치한 서울수도권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제한적으로만 적용되고 각 지역의 조례들이 무력화되어 온 흐름에서 각 영역의 투쟁 이슈, 각 지역의 조례 대응 운동이 함께 연대를 강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 역시 소중하다. 각 영역/지역의 반차별 의제가 실질적으로 힘을 갖고 추진되기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 제정에 함께 하는 단위들과의 공동행동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내고 저변을 넓히는 것 역시 제정까지 이르기 위해 꼭 필요한 방향이기도 하다. 차별은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에 지역의 인권시민사회단체뿐만 아니라 마을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단위나 문화예술 단위 등과의 접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기존의 제정 운동에서 많이 만나지 못했던 곳들과도 ‘차별금지법’으로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우리의 걸음과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의 저변이 그 만큼 조금씩 넓어져왔다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반갑기도 했다. 이 모든 활동을 함께 할 동료들이 더 많이 늘어난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동의’에서 ‘행동’으로
시국회의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운동의 방향은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한걸음 더 움직여 '제정을 위한 행동'의 자리로 이끌어내자는 것이었다. 굳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문조사 결과를 짚지 않아도, 이미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합의나 공감대 형성이 ‘먼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어려울 정도로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암묵적 합의나 동의 정도가 높다. 그만큼 차별에 대한 인식이나 공감대가 높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어느 때보다 사회적 여론이 높은 상황은 제정의 전망을 밝혀주는 중요한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 위에서 올해는 ‘나에게/우리에게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실질적인 움직임으로 전환시키는 운동의 필요성이 등장한 것이기도 하다.
‘한 걸음 더 움직이게 하는 것이 어렵다.’
한 참가자의 말처럼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 낼 수 있을까? 사람들을 ‘제정을 위한 행동’로 초대하고 이끌어내자는 것을 목표로 삼은 이유는 그것이 쉽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과 행동들을 모아내지 못한다면 실질적으로 제정에 이를 수 없다는 판단이 모였기 때문이다. 그럴 때 마냥 막막하지만은 않고, 우리에게 주요한 참조점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힘을 주기도 한다. 김진숙 지도의 복직투쟁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투쟁에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향했던 계기를 떠올리며,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역시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가자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 발걸음들이 사회적 흐름이자 힘으로 보이게 만들고, 그 힘으로 제정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2021년의 시간이 되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의 곁에 서는 시간
언젠가 #BlackLivesMatter(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운동을 시작한 사람 중 하나인 패트리스 컬러스에 관한 글을 읽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을 잃은 후, 자신의 운동에 대해서 그는 ‘집단적인 전환’을 이루이기 위해서 ‘집단적인 힘’을 모아야 하고, 그 집단적인 힘을 만들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행동’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집단적인 행동을 만들기 위해서는 희망과 영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비통함과 분노에 뿌리를 두지만, 전망과 꿈을 향하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희망이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읽을 당시에는 뻔한 말이기도 하고 조금은 낯간지럽기도 한 마음에 스쳐 지나간 기억이 난다. 하지만 ‘곁에 서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는 한 시국회의 참가자의 이야기를 보고 나서, 잊고 있었던 저 말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위험하고 불안한 시기에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혹은 우리 스스로를 피해자로만 그리거나 아픔만을 강조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때라는 참가자의 말을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바람처럼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혼자가 아니라 곁을 확인하고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가고 싶다.
4월 8일, 시국회의 참여자들이 제안한 시국선언문이 4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연명과 함께 발표되었다. 참가자들이 함께 검토한 “[시국선언문] 차별금지법은 생존의 요구다”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부고가 전해질 때마다 우리의 삶이 시국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우리도 지워왔을지 모를 소중한 존재들을 더 너르고 단단하게 연결할 것”이라는 다짐, 차별에 맞설 권리와 책임을 우리 모두가 함께 외칠 것이라는 다짐 속에서 지금 여기의 삶을 버텨 나갈 수 있는 희망을 얻는다. 그 희망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내고 싶다. 그 과정 속에서 차별금지법 역시 제정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