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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성평등 도서 폐기 사태, 가로막히는 건 책만이 아니다

지난 8월 28일 성평등·성교육 도서에 대한 열람 제한 및 폐기 사태 대응 토론회 <성평등, 평등하고 자유롭게 배울 권리>에 다녀왔습니다. 2015년 교육부에서 학교 성교육표준안 관련하여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고, 남녀에 따른 왜곡된 성역할을 규정하며 성폭력의 원인을 여성으로 돌리는 등의 문제가 있는 지침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후 기존의 성교육표준안은 폐기하고 새롭게 포괄적 성교육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어왔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포괄적 성교육은커녕 성차별적 인식을 강화하는 흐름을 이어왔는데요. 이 외에도 여성가족부가 진행해온 2020년 나다움어린이책 사업을 보수 정당과 개신교의 공격 속에서 성평등 도서를 회수, 폐기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연장선 속에서 작년부터 올해까지 꾸준하게 보수 개신교 기반의 학부모 단체가 충남, 경기 등의 지역에서 성평등·성교육 도서의 폐기를 요청하고 각 지방 정부와 교육청에서 해당 도서들을 검열, 폐기 처분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공공의 영역에서 성평등을 표방하는 모든 것이 삭제가 반복되는 현실은 구조적 성차별도 없고, 반복되는 디지털 성폭력 사안도 과장되어 있다는 정치권의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텐데요. 이 반복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과 고민이 필요한지 이번 토론회에서 함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토론회의 첫 번째 발표를 맡아주신 초등학교 교사 박효진 님은 교사로서 만나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이미 성적 주체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학교와 국가는 성적 주체로서 어린이, 청소년을 인정하고 어떻게 대할 것인지 진지하게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발표를 해주셨는데요. 보수 기독교 단체에서 어린이 청소년에게 성적 권리는 물론 성적인 호기심 자체를 갖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방식은 이미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와 학교가 이런 단체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일방적으로 성평등 도서를 폐기하는 것은 어린이 청소년을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해주셨습니다. 지금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은 어린이 청소년을 성적 주체로서 인정하고 포괄적 성교육을 진행하기 위한 교사, 학교의 역량을 키우는 일, 이에 맞게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강조해주셨습니다.

이에 더 나아가 두 번째 발표자였던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타리 님은 포괄적 성교육의 과정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더욱 진지하게 토론해보아야 한다는 발표를 이어주셨습니다. 포괄적 성교육이 성적욕망, 성생활을 포괄하여 가르친다고 하지만 실천적 의미에서 성적 즐거움을 가르치지 않으면 결국 어떤 권리들을 배제시키는지 질문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항문 섹스나 구강 성교 등을 가르치는 것은 나쁜 성교육으로 묘사하는 사회에서 성소수자, 장애인 등 소수자의 성적 욕망과 실천에 대해 외면한 채 ‘포괄적’ 성교육을 실천하자는 말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성교육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경험과 고민을 듣고, 낙인이 아닌 과학적인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기 위한 사회의 역량이 함께 키워지지 않은 채 포괄적 성교육이라는 구호만으로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진단이었습니다. 발표의 소재만으로 도발적인 이야기처럼 시작되었지만, 모두의 성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적 정보에 접근하기 위한 첫 단계인 성평등 도서 검열과 폐기 사태는 성적 권리에 대한 접근부터 가로막는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발제로는 문화연대 정원옥 님이 해주셨는데요. 성평등 도서를 폐기하는 일은 과거 금서를 지정하고 폐기해온 검열의 역사 속에서 읽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도서에 대한 검열과 금지 시도는 그저 책에 대한 통제가 아니라 사상에 대한 통제이며 지적 자유를 침해하고 위축시키기 위한 시도이기 때문인데요. 지금의 도서 검열 사태는 그저 보수적인 성평등, 성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흐름이 아니라 차별금지법 제정을 가로막는 세력들이 정치적인 행위를 이어가는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좌편향·왜곡도서’에 대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던 박근혜 정부나 지금 ‘음란유해도서’를 검열하도록 방관하는 윤석열 정부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어린이·청소년의 도서에 대한 검열은 성교육에 대한 정보를 어린이·청소년이 접근하지 못하는 효과만이 아니라 성교육에 담아야 할 ‘도덕’적 기준마저 검열하며 모든 이들을 ‘계몽’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는 이야기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세 분의 발표를 마치고 성평등 도서 검열·폐기의 문제점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을 담은 발표를 듣고 각 지역에서 해당 사안들을 어떻게 대응해 왔고,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지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지역의 도서관에서 검열되고 있는 도서의 리스트를 검토하고, 지역 인권 센터에서 반인권 인사가 성평등 교육을 주도하는 현실에 맞서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는 이런 사안들을 두고 개별 대응과 함께 여러 지역이 공통된 대응을 이어갈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성평등이라는 가치 앞에서 정치권의 각기 다른 정치적 지향은 무색해지는 것 같습니다. 모두 성적 권리는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하며 성평등 실현은 방치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현실 바꿔내는 정치적 흐름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이번 토론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특히나 요즘 텔래그램 n번방에 이은 딥페이크 사태와 같은 성폭력 사태가 일상에서 벌어지지만 문제로 인식조차 못하는 수준의 답변이나 하는 정부와 정치권을 바라보면 더욱 그러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요. 성평등을 외치는 정치적 흐름을 모아나가기 위해서 차별금지법 제정연대에서는 지역정치와 성평등을 연결시키면서 고민을 이어 가보려고 합니다. 이에 9월 25일 차별금지법에서 준비하는 성평등 도서 검열, 폐기 사태를 대응하면서 도서 검열 사태를 넘어 성평등의 가치를 반차별운동의 맥락에서 더욱 연결하고 지역 정치까지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전략을 모색하는 자리를 한 번 더 준비했습니다. 열심히 고민하고, 지역 정치에서 성평등을 어떻게 기입하는 계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 열띠게 모색해보겠습니다. 9월에도 많은 관심과 지지, 참여 부탁드립니다.

 

* 토론회 자료집은 [인권운동사랑방 홈페이지 > 아카이브 > 자료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