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쌀, 의약품, 소고기, 스크린 쿼터 등 쟁점이 되었던 사항 이외의 협상 쟁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 내용이 별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굳건히 입에 자물쇠를 잠군 한국정부의 과도한 충성심 탓이다. 그나마 교육이나 의료 분야는 해당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투쟁과 저항으로 인해 민영화(사유화), 시장개방이 가져올 폐해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FTA가 더 좋은 교육 기회와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보장할 것이라는 전망은 허구적인 공세에 불과하며, 오히려 사회양극화와 빈곤이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FTA와 공공서비스
이러한 상황에서 에너지와 FTA는 어떠한가. FTA 체결에 따른 에너지산업의 변화 양상과 구체적인 협상 쟁점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쌀과 쇠고기라는 식량, 교육과 의료는 FTA에 대한 찬반 입장을 떠나 국민들에게 위기감으로 다가오기 쉽다. 그러나 에너지 분야는 협상의 쟁점조차 언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타의 공공서비스 제반 영역과 마찬가지로 체감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물론 지적재산권, 정부조달 등의 영역은 더욱 심각하다. 5월 15일 정부가 발표한 한미 FTA 협상 대상인 22개 챕터의 항목을 보면 말할 나위도 없다. 기술 장벽, 일시입국, 전자상거래, 분쟁해결, 투명성과 예외 및 최종조항 등은 거의 각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소화할 수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렇듯 현재의 협상은 철저히 권위주의적 전문성과 관료적 엘리트주의를 무기로 하여 국민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협상의 구체 내용이 전혀 공개되지 않음으로써 한국사회의 저변을 흔들 한미 FTA 협상은 국민적 공감대가 전무한 채 진척되고 있을 뿐이다.
특히 공공서비스 분야와 에너지 산업에 미칠 FTA의 영향력에 대한 언급은 전무할 뿐 아니라 오히려 “예외” 혹은 “제한”이라는 풍설만이 나돌고 있다. 5월 15일 외교통상부는 한미 FTA 협상 관련하여 두루뭉술한 협정문 초안을 발표하였다. 총 22개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품과 무역관련 6개, 서비스 투자 관련 6개, 기타 분야 5개와 일반사항 5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어디에도 공공서비스나 에너지에 대한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4월 21일 정부 관계부처 합동이라는 명의로 제출된 “한미 FTA Q&As-최근비판론을 중심으로”라는 자료를 보면, “(공공서비스) 전기 가스 수도 등 공공서비스를 외국 자본에 팔아먹는다?”라는 우리들의 비판에 대해 답변을 내리고 있는데 답변이 참으로 가관이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공공서비스와 관련한 우려는 지나친 측면이 있음. 정부는 전기 가스 수도 등 공공서비스 분야는 해당 공공서비스의 특성, 국민 경제적 중요성, 국제적인 관례, 자유화 필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되 최대한 공공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입장이 얼마나 거짓된 것이며, 소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기만적인 작태인지를 간략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에너지 팔아넘기기는 진행형
먼저 전기, 가스, 수도를 팔아먹기 위한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시도는 현재 진행형이다. 2000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된 전력산업 구조개편 촉진에 대한 법률이 2009년까지 살아있는 상황에서 발전 매각, 가스 직도입 등 완전 사유화를 위한 정부 정책은 여전히 다양한 양태로 추진되고 있다. 올해의 전기위원회 사업보고서만 보더라도 발전 매각(남동 발전 매각)이 직시되어 있고, KOTRA 산하 인베스트코리아에서는 외자유치 정책의 일환으로 발전 매각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이미 밝힌 바 있다. 가스는 더욱 심각하다. 직도입을 허용하고 신규물량을 사적 자본에게 지속적으로 넘기는 방식으로 가스 산업의 실질적 사유화가 상당 부분 진척되고 있다. 가스의 직도입 허용은 발전 전원의 개방을 의미하며 에너지 사적 자본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주요한 기폭제가 된다는 점에서 에너지 산업의 시장화와 경쟁구도 확장의 주요한 계기가 된다. 수도는 어떠한가. 전국 167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해오던 상수도 사업을 민간위탁 방식으로 사유화하는 것이 현 정부의 기본 방침이며, 논산 사천 예천 정읍 등에서는 민간위탁이 이미 실시되고 있다. 더욱이 그나마 경쟁력 있는 7개 특 광역시를 1단계로 우선 공사화하고, 다음으로 공사 간 경쟁, 그 다음으로 사적 자본과의 경쟁과 공사에 대한 침투를 통해 완전 경쟁, 곧 민영화하겠다는 정부 의지는 확고하다. 지난 해 10월과 올 초 거듭 환경부에서 발표한 물기본법 제정은 상수도 사업의 사유화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수도 부문은 외국인 투자 지분 제한 등의 최소한의 제한 조항도 없는 상황에서 FTA이 체결된다면, 민간위탁 방식이건 공사를 민간자본에 내어놓는 방식이건 국내 상수도 사업의 전면적 민영화는 매우 쉽게 추진될 수밖에 없다.
또 최소한 공공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한다는 말의 진의는 무엇인가? 공공성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논리대로 한다면”, 계급과 계층, 소비의 능력과 지역적 불균등 여하에 구애받지 않고 살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고 물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8-9년간 정부와 자본이 고집해온 공공서비스 사유화 논리는 이 기본 권리를 심각하게 위축하고 있다. 99년 전력산업 사유화의 일환으로 안양 부천 열병합 발전소가 매각되고 나서 해당 주민들은 3-40%의 급격한 요금인상을 경험해야 했다. 69%가 외국인의 것인 포스코가 소유한 포항도시가스는 최근 12% 요금을 폭등시켰다. 군단위 면단위로 넘어가면 상수도 보급률은 33%밖에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지자체 재정은 상수도 보급과 안정적 물 공급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심각한 것은 다만 요금 인상 여부만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에너지와 물과 같은 공공서비스라는 점이다. 지난 4월 초 제주도와 여수에서 빚어진 대규모 정전사태는 전력산업 사유화와 매각을 위한 부당한 조치가 전력이라는 민감한 네트워크 산업의 유기적 관계를 심각히 해체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광역 정전사태, 전국적 블랙다운 현상은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캘리포니아와 빅토리아의 대규모 정전사태는 전력산업 사유화가 불러온 재앙이었고 결국 이들은 재국유화의 길을 밟고 있다. 상수도 사업 민영화로 공급 중단 사태와 30배의 요금인상을 경험한 볼리비아 사태 역시 시사점이 크다 할 것이다. 이렇듯 공공성을 심각히 훼손하는 공공서비스 사유화라는 시장개방, FTA 추진을 위한 자발적 상납을 현 정부는 거세게 밀어붙이면서도 “최소한 공공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한다”는 거짓된 논리로 국민을 우롱하고 있을 따름이다.
최소 제한장치조차 없다
더더욱 문제인 것은 현재 공공서비스는 관세협정이나 제한 조항의 대상조차 아니라는 점이다. 협상이 통상 네가티브적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스크린쿼터나 쇠고기 수입 제한, 농수산물 관련한 관세 및 예외 조항, 약값 산정 등과 같은 조항 등은 자본의 입장에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공공서비스는 관세와는 전혀 무관한 서비스 시장이며, 일부 제한 조항과 예외 조항, 혹은 국내 규제 관련법들이 문제가 될 뿐이다. 특히 전력산업과 가스 산업의 경우 사유화 정책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법률적인 측면에서 문제될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오히려 최근 가스 직도입을 추진하면서 에너지 산업 전반의 시장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토대가 형성되어 있다. 최근 도시가스사업법 개정안을 보면 가스 산업 사유화 정책을 확정짓는 설비공동이용제(OAS) 등이 직시되어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상수도 분야인데, 그 어떠한 제한 조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공서비스 산업에서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 투자지분 제한뿐이다. 그러나 이 조차도 최혜국 대우, 내국민 대우 조항에 의해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이렇듯 국내법에 상위하는 FTA 협상의 위력은 대단하다. 특히 에너지와 물과 같은 공공서비스의 경우 환경적 측면, 지역적 연계와 공공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강제되었던 여타의 법적 조치는 이행의무부과 금지 조항에 의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바로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공공서비스, 특히 에너지와 물과 관련하여 정부는 굳건히 함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자발적 개방, 곧 자발적 상납을 위한 제반 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상황에서 굳이 쟁점화하여 골치 아플 필요가 없으며 국민들과 해당 노동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공공성 확보를 위한 노력”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에너지 산업 관련하여 남은 것은 자발적 상납을 위해 불필요하게 존재하는 국내법을 정비하고 경쟁과 시장을 촉진하기 위한 제반의 국내적 조치를 매우 “조용히” 추진해주는 일뿐이다. 에너지와 물에 대한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서도 한미 FTA는 막아내야 한다.
덧붙임
송유나 님은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사무처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