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시간을 아무리 늘려도 1시간 이상은 안 된다고?”
‘노동기본권 실현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대표 단병호)에서 우리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아래 네트워크)에 실업계고등학교로 직접 찾아가는 노동인권교육을 함께 진행해 보자고 제안해 왔을 때만 해도 꽤 괜찮은 기회다 싶었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70명 내지 100명에 달하는 고3 실업계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1시간 안에 교육을 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우리 네트워크가 노동인권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한 이래, 이곳저곳에서 교육을 진행해 보았지만 이런 악조건은 처음이었다. 소규모의 참여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한 학급을 넘지 않는 숫자의 참여자들이 하나의 교육활동에만 1-2시간씩 할애하면서 노동인권에 서서히 다가도록 해야 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었는데, 참으로 난감했다.
날개 달기 : 끼워 맞추기
실업계 고등학교를 직접 찾아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과 함께 진행하는 노동인권교육 프로젝트는 지난 12일과 14일 이틀간 서울, 인천, 충청 등 5개 학교에서 진행됐다. 처음부터 노동인권교육에 대한 학교와의 관점 차이로 프로그램을 정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을 대규모로 동원해 놓고 높은 사람(?)으로부터 훈시를 들려주고 밖에다가는 국회의원을 모셨네 하고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일부 교사들과 자칫하면 노동인권교육이 이렇게 재미없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구나 하는 편견을 가질까봐 걱정하는 우리 네트워크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다. 단순히 노동법 관련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깨고 노동인권을 자기 삶과 연관시켜 풍부하게 인식하고 체험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원칙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미래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현실에서 꿈틀대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감, 노동인권을 옹호하고 적극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이 세 가지가 노동인권교육의 핵심일 텐데, 100명의 아이들과 단 1~2시간 만에 함께 부대끼며 잠자고 있는 힘을 깨워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결국 현실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도전 골든벨! 지키자 노동인권!”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인천정보산업고등학교. 우선 책상과 의자를 모두 치워버린 넓은 강당에 5명씩 한 모둠을 구성하고 편하게 앉도록 했다. 그 다음엔 약간의 쇼맨십도 필요한 순간이다. TV 오락프로그램 진행자처럼 재미있는 멘트로 꿈틀이들의 시선을 끈 다음, 드디어 골든벨이 시작됐다.
더불어 날갯짓 1 : 답보다 중요한 것
“얼마 전 국내 유명 패스트푸드점들이 청소년 알바생들에게 줘야 할 수당을 떼어먹고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야간노동을 시켜 온 사실이 노동부에 적발된 적이 있습니다. 다음 중 노동부에 적발된 업체가 아닌 곳은 어디일까요? ① 롯데리아 ② 맥도날드 ③ KFC ④ 파파이스 ⑤ 인천 전자 피자”
문제를 읽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꿈틀이들이 귀를 쫑긋 세우기 시작한다. 문제가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재잘재잘 즉석 토론이 벌어진다. “내가 거기서 일 해봤는데 거기 진짜 구려~.” 멀리 한 모둠에서 튀어나온 이야기. 쓱싹쓱싹 나눠준 스케치북에 답을 적기 시작한다. “자, 그럼 모둠별로 의논이 끝났으면 하나, 둘, 셋에 맞춰 정답을 들어 주세요.” 모두가 정답을 들어올렸다. 골든벨은 하나의 계기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문제를 내고 정답을 맞히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그다지 의미가 없다. 문제를 계기로 꿈틀이들의 경험을 교육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분 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본 경험이 있는 분 있나요?”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 번쩍 든다. “혹시 일 하면서 부당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나요?” “돈을 조금만 줬어요~!”
“첫 문제는 너무 쉬웠나요? 그럼 다음 문제.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들을 묶어 노동법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중 이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전원일기>의 원조얼짱 응삼이 아저씨 ② <어느 멋진 날>의 성유리 ③ <연애의 목적>의 박해일 ④ MBC 김주하 아나운서”
역시 문제가 끝나기 무섭게 시작되는 웅성웅성거림. 사실 이 웅성거림이야말로 골든벨, 노동인권교육의 핵심이다. 이번에는 모둠별로 꽤나 다른 답이 나온다. ①번, ③번이 대다수였다. 꿈틀이들 사이에 리포터 역할을 담당할 한 명의 돋움을 두고, 마이크를 들고 모둠을 돌아다니게 했다.
“왜 ③번이라고 생각하세요?”
“박해일은 선생님이지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선생님은 노동자가 아닌가요? 노동자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노동자는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번에는 ①번을 적은 모둠에게 찾아가 본다.
“왜 응삼이 아저씨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농민이랑 노동자랑 다르잖아요.”
“농민도 땀 흘려 일하고, 노동자도 땀 흘려 일하는데 뭐가 다른가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 식의 대화를 통해서 평소 꿈틀이들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다시 한 번 노동자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노동자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더 풍부하게 드러내면 좋으련만, 시간에 쫓겨 노동자 개념을 간단하게 정리해 준 뒤,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노동을 시작할 때 꼭 써야 할 근로계약서,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 놓은 근로기준법, 실수로 다쳐도 일 하다가 다치면 보상받을 수 있는 산업재해 등등.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정보와 대응방법을 문제풀이를 통해 함께 찾아나갔다.
“다음 중 임금을 못 받았을 때 할 수 있는 방법 중 바람직하지 않는 것은? 정답을 있는 대로 모두 적어 주세요. ①사장에게 임금을 달라고 계속 요구한다. ②관련 상담소나 주변의 어른들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③노동부에 신고한다. ④억울하여 회사 기물을 파손한 뒤 못 받은 만큼 훔쳐간다. ⑤적선한 셈치고 내가 참는다. ⑥임금을 못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모아둔다.”
역시 대부분 비슷한 답을 적었는데 한 모둠에서 조금 생뚱맞게 ①번을 적었다.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 봤는데요. 사장에게 임금을 달라고 요구해도 어차피 주지 않기 때문에 바람직한 방법이 아닌 거 같아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세요?”
웅성웅성, 갸우뚱 갸우뚱. 정말 요구해도 안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 꿈틀이들이 꽤 있는 듯 했다. 어디선가 “그래도 달라고 해야 해요.”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예. 실제로 많은 사장들은 임금 달라고 요구해도 배 째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의 경우에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요구하니까 돈을 주더라구요.”
더불어 날갯짓 2 : 골든벨 속 상황극 - 권리를 되찾자!!
시간이 제법 흐르자, 단순한 문제풀이 방식을 넘어 꿈틀이들이 직접 상황극을 통해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준비한 보너스 문제가 나가는 시간~.
“다음은 보너스 문제입니다. 이번 문제를 맞히는 경우 즉석 과제를 주겠습니다. 이 과제를 해결하면 보너스 점수를 주겠습니다.” 보너스 점수라는 말에 아이들의 눈빛이 한결 초롱초롱해진다.
“최저임금은 매년 한 번씩 새로 정해집니다. 2005년 9월 1일부터 올해 말까지 적용되는 최저임금은 과연 얼마일까요?” 문제가 나가자 웅성거림이 더욱 커진다. 답도 각양각색이었다. 2480원, 2500원, 3000원, 3100원. 올해 말까지는 3100원이라고 정답을 말해주자 웅성거림이 더욱 커진다.
“아! 난 2500원밖에 못 받았어요. 억울해요.”
“우와. 최저임금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간단히 최저임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얘기해주고, 매년 최저임금을 올리기 위해 싸우고 있는 청소용역 노동자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분들이 그렇게 힘들게 싸우기 때문에 그나마 3100원이라도 되는 거예요.” 꿈틀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문제를 맞힌 모둠에게는 각각 다른 상황을 하나씩 제시해준 뒤, 모둠별로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하고 실제로 해결하는 과정을 상황극으로 보여주게끔 했다. <임금을 주지 않아요>, <일하다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사장이 나 몰라라 해요>, <친구랑 여행 계획을 세워뒀는데 휴가를 주지 않아요>, <생리통으로 배가 너무 아픈데 생리휴가를 주지 않아요>, <하루 종일 일해서 너무 피곤한데 쉬는 시간을 주지 않아요> 등등 일터에서 자주 겪을 수 있는 상황을 간략히 제시해 줬다.
모둠별로 웅성웅성 이야기가 오가더니 드디어 상황극이 펼쳐진다.
노동자 1: “아, 배 아파 죽겠다”
노동자 2: “왜 그래? 많이 아파?”
노동자 1: “어. 오늘이 그 날이야.”
노동자 2: “어떡해? 사장님한테 부탁하고 집에 가서 좀 쉬면 안 될까?”
노동자 1: “허락해줄까?”
노동자 2: “우리 사장...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야기 해보자. 내가 같이 가줄게.”
노동자 1: “그래, 그러자.”
똑똑!
사장: “누구세요? 들어와요.”
노동자 1: “사장님, 저 너무 배가 아파서요. 생리통 때문에 그런데 오늘 좀 쉬면 안될까요?”
사장: “그거 누구나 다 하는 건데 그것 가지고 그러면 쓰나.. 잠시 쉬었다가 일해.”
노동자 1: “아니, 사장님. 너무 배가 아파서 도저히 일을 못 하겠어요.”
사장: “그거 가지고 일 못하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겠나! 우리 어릴 때는 말이야... 애를 낳고도 바로 다음 날부터 일했어.”
사장이 한층 언성을 높이고 오히려 더욱 꾸지람을 주며 몰아친다. 처음에는 공손하게 부탁을 하던 노동자는 사장의 태도에 분노를 느끼고 갑자기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노동자 1: “아니, 사장님! 생리휴가는 노동자들의 권리예요. 왜 그걸 안 된다고 하세요?”
사장: “그런 권리 다 찾아가면서 어떻게 일을 하고 돈을 벌어?”
노동자 1: “아니, 사람이 건강하게 일을 해야지,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하지 않고 어떻게 일을 시킵니까?”
순간 분위기는 숙연해지고, 실제 상황인 듯 착각할 만큼 전체가 상황에 몰입한다. 몇 차례 더 고성이 오고가고, 점차 우리의 꿈틀이는 더욱 또박또박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한다. 결국 사장의 입에서 “요새 애들은 이래서 문제야. 알았어. 그럼 들어가서 쉬어”라는 말이 떨어진다. 말이 나오기 무섭게 꿈틀이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소리는 떠나갈 듯하다.
노동자 1: “사장님 저 휴가 보내주세요. 애인이랑 휴가 계획 다 세워뒀어요.”
사장: “아니, 지금 일이 이렇게 밀렸는데 자네 재미만 찾으면 회사가 돌아가겠나? 자네, 애인은 어디 있나?”
다른 모둠의 꿈틀이들이 짓궂게 큰 소리로 외친다. “애인은 생리휴가 갔어요~~.”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엥? 알고 보니 앞서 열연을 했던 친구가 바로 애인이었다. 바로 이런 게 상황극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잠시 웃음소리로 맥이 끊긴 상황극이 진지하게 이어진다. 꿈틀이들의 진지하고도 당찬 항의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직접 인권침해 상황에 뛰어들어 권리를 되찾는, 숨죽여 있던 내면의 힘에 생명을 불어넣는 펌프질이 이어진 셈이다. 하나의 상황이 끝날 때마다 노동인권을 지키기 위한 간단한 정보를 알려주니 더 귀에 쏙쏙 박히는 것 같았다.
상황극이 끝나고, 1시간 20분간의 골든벨도 끝났다. 예정 시간을 훌쩍 넘기고서. 아무래도 1시간은 너무 무리였던 게 틀림없다. 골든벨이 끝난 후에는 함께 간 단병호 의원이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도 상고 출신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단 의원의 이야기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중퇴한 이야기, 역시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 이야기, 수배와 징역을 살았던 이야기 등등을 돌아돌아 이어졌다. 이야기의 중심은 노동자로서의 긍지와 자랑스러움이었고, 미래 노동자들에 대한 존중과 기대였다.
마음을 맞대어 : 한계를 딛고 꿈틀대기!
총 2시간.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한계가 노정된 프로그램이었지만 난생 처음 접하는 노동인권교육이 꿈틀이들에게 지루하지 않게 다가가고, 필요한 기본 정보를 알차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노동인권교육은 꿈틀이들에게 노동인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노동인권을 옹호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노동인권교육은 삶을 바꾸는 계기이자 정체성과 연대성을 통해서 스스로 세상의 중심에 서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아쉽게도 2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진행된 일회성 골든벨은 제대로 된 노동인권교육이 되기에는 너무 큰 한계가 있었다. 최근 많은 경우 노동인권교육이 따분한 일회성의 노동법 지식 전달에 그치면서 ‘2시간의 한계’가 ‘2시간의 면피’로 탈바꿈되고 있다. ‘2시간의 한계’가 깨어지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사방팔방에서 꿈틀될 필요가 있다. ‘노동인권교육이 진정 재미있고 꿈틀이들의 변화와 함께 호흡하는 의미있는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 이번 골든벨을 통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점이다.
그렇지만 그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번 교육이 자그마한 결실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권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일깨워준 꿈틀이들 덕분이다. 이렇게 서로에게 배움을 얻는 과정이 인권교육의 참맛 아닌가. 제발, 이 2시간의 인연이 계기가 되어 많은 학교에서 지속적이고 의미 있고 재미있는 노동인권교육이 시작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덧붙임
◎ 윤성봉 님은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활동가,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