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의 부활?
무덤까지는 가지 못했을지 몰라도 최소한 관 속에는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이던 국가보안법의 망령이 관 뚜껑을 열고 세상에 다시 등장했음을 충격적으로 알린 사건은 이른바 ‘일심회’ 사건이었다. 지금 재판이 진행 중인 이른바 ‘일심회’ 사건 관련자 5명이 국정원에 적발되고 검찰에서 기소되는 과정을 통해서 국가보안법 사건 때마다 예전에 되풀이되었던 마녀재판식 행태가 그대로 불거졌다. 현직 국정원장이 수사 중인 사건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간첩단 사건”이라고 ‘흘렸’지만, 그것은 공안기관들의 기대일 뿐 국가보안법 상 ‘간첩’죄로 기소한 검찰의 공소장에서도 아직 구체적인 증거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른바 ‘일심회’ 사건은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들의 공동선언 이후 터진 간첩 또는 간첩단 사건이라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었지만, 이런 충격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기보다는 국정원과 결탁하여 사건 부풀리기에 나선 일부 수구언론의 보도행태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청와대를 겨냥하더니 종국에는 민주노동당 흠집내기에 혈안이 되었다. 이른바 ‘일심회’ 사건을 통해서 진보세력 전체를 ‘친북세력’으로 매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지난해 여름 전교조 부산지부 통일위원회의 통일연구 자료를 ‘이적표현물’로 몰아붙인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직까지 기소조차 되지 않고 있다.
지난 1월에는 전교조 서울지부 통일위원회 소속 2명의 현직교사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글과 북한과 관련한 사진 때문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게시한 글과 사진은 언론사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누구나 접속하여 볼 수 있도록 게시된 표현물이고, 교사들끼리 통일교육 개발을 위해 연구한 자료들임에도 불구하고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 현직교사 구속으로까지 나아갔다. 곧이어 2월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현직 언론인이자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의 집과 작업실을 압수수색하며 내사를 벌이고 있고, 이른바 ‘일심회’ 관련자로 전 국회의원 보좌관 박 아무개 씨 체포, 구속도 이어졌다.
과거 국가보안법 사건의 재조명
지난해 하반기 이후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급증하고 있는 반면, 지난 1월 23일에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났다. 사법부는 유신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비상조치였던 ‘긴급조치’에 의해서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 판결을 받은 지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되었던 8명의 ‘인혁당재건위’ 피해자들에 대해서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한 모든 기소 사실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선고했다. 32년 만에 처음으로 ‘인혁당재건위’라는 반국가단체 구성과 가입 활동 모두가 조작에 의한 거짓이었음을 법원이 인정한 것이었다. 곧이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80년에 간첩 혐의로 기소되어 15년형을 살았고, 대법원이 재심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유죄로 재심 기각한 ‘신귀영 씨 일가 간첩단 사건’에 대해 “고문이 빚은 조작사건”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또 대법원은 유신과 전두환 정권 시절의 시국·공안사건 판결문 6천여 건을 검토한 결과 200건 이상의 사건들에 고문과 불법구금 논란이 있었다는 검토결과를 발표했다. 이 200여 건의 사건 중 주요사건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그렸던 ‘간첩단 사건’이었다. 그동안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비롯한 인권단체들이 주장해왔던 조작간첩 사건들의 실체를 대법원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인혁당 사건’이나 ‘신귀영 씨 사건’과 같이 과거 간첩 또는 간첩단 사건들의 재심이 진행되고 있고, 재심에서 법원은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것을 판결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
그런데 문제는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단죄를 받아야 할 그 기관들이 지금까지도 또다른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수사·기소하고, 영장을 발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직 전교조 교사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한 사건은 서울경찰청 보안2과 소속의 장안동 대공분실이 조사한 사건이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부가 법원에 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어김없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이 한편에서 밝혀지는 가운데 예전과 같은 국가보안법 피해자 역시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김대중 정부 이후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왔고, 노무현 정부 이후로는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남북이 ‘평화공존’을 지향해 가는 상황에서 군에서도 주적 개념이 바뀔 정도로 남북관계는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기관은 여전히 색안경을 벗지 못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여전히 국내 정보를 수집하며 사건에 대한 수사권까지 갖고 있고, 경찰청 보안수사대는 아직도 전국적으로 30여 곳에서 국민들을 감시하고 있다. 검찰 공안부는 그 위상이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며 별로 할 일을 못 찾고 있다. 경찰에서만 이러한 공안관련 인력이 1천 명 이상 남아돈다는 말이 나오면서 최근 공안기관들이 대선을 앞두고 자신들의 ‘고용안정투쟁’을 하고 있다는 조롱 섞인 말이 나올 정도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경우, 중앙정보부(현재의 국정원)가 고문조작수사를 진행했고(당시 수사책임자였던 중정 6국장 이용택, 그는 11·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차 인혁당 사건 때 법무부장관을 했던 민복기가 대법원장으로서 ‘인혁당 사건’ 피해자 8명에 대한 사형을 판결했고, 당시 검찰총장은 김치열 전 내무부장관이었으며, 사형집행 명령을 내린 이는 서종철 국방장관이었다. 당시의 법무부 장관은 황산덕이었고, 중앙정보부장은 1차 인혁당 사건 당시의 검찰총장이었던 신직수였다. 그 위로는 국무총리 김종필, 대통령 박정희가 있었다.
지금의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들은 국가보안법 자체의 부활만이 아니라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결과로 귀결되는 공안기관의 부활이란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인권과 양립할 수 없는 국가보안법은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지만, 그 이전에라도 국가보안법을 악용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강화해온 세력들을 청산하는 작업은 우선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과거청산은 이미 끝난 게 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먼 우리 사회의 역사적 과제다. 올해는 과거 국가보안법 사건의 재심과정이나 대법원의 사건 재조명 과정, 그리고 이들 사건에 대한 과거사위원회의 결정 과정에 우리 사회가 좀더 책임있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과거청산은 ‘화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화해’로 가기 위해서는 ‘책임’ 역시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무고한 피해자들을 양산했던 사건들의 가해자들은 그에 해당하는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 ‘책임’ 없이 ‘청산’과 ‘화해’는 있을 수 없다.
올해 대선국면을 활용해 냉전수구세력이 우리 사회에 전면적으로 재등장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공안기관들은 ‘국가보안법 사건’들을 만들어 내는데 더 혈안이 될 것이고, 수구언론들은 냉전세력의 선두가 되어 우리 사회의 정치 표현·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앞장설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과거 국가보안법 악용 사건들의 진실을 파헤치고 바로 세워나가는 게 중요하다. 과거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지금’의 문제이다. 다시는 국가보안법에 의한 인권침해가 없도록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과거 국가보안법을 통한 인권침해 가해자들을 제대로 청산하는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굳은 다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