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4일에는 여성 교사에게 술을 따르라고 강요한 남성 교감의 행위가 성희롱이 아니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있었다. 상사인 교장으로부터 술을 받았으면 답례로 술을 권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한 말이라는 것,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여성 교사들은 성적 굴욕감과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사회 공동체의 건전한 상식과 관행에 비추어 선량한 풍습과 사회질서에 위반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직장 내 성희롱을 용인하는 관행과 상식을 문제제기 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희롱 관련 조항이 오히려 관행과 상식을 이유로 기각당한 것이다.
나는 이번 판결을 보며 지난 나의 경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나의 경험과 여성 교사의 경험은 매우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성이기에 함부로 술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나 싫다는 여성에 술을 따르라고 강요한 행위는 결코 다른 선상에 있지 않다. ‘술을 함부로 따르면 안 되는’ 여성은 ‘술을 함부로 따르는/따라도 되는’ 여성을 상정하기에 가능한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숙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이라는 개념은 모두 공적 영역으로부터 배제된 여성을 의미한다. 즉 남성의 사적인 영역(가족)에 종속되는 여성이거나 비공식적 자리에서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적으로 남성과 동등하지 않은 여성은 (사적인 영역에서는 물론이려니와) 공적인 자리에서도 남성의 통제의 대상이 된다. 너는 여성이다, 너는 그래봤자 여성이다, 라는 논리가 공적인 영역에 진출한 여성을 좌절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에 하나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남성들의 인식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술(못)따르기 강요가 성희롱이냐 아니냐를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성희롱의 문제는 어떤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성희롱이 되는 것도 아니며 성희롱은 피해자의 주관과 함께 그것이 성희롱 피해가 되는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행위를 성희롱이다/아니다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경직된 사고로는 ‘성희롱’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 제기하고 있는 많은 논쟁점들을 간과하게 된다. ‘술을 따른다’는 행위가 ‘여성’이라는 것과 만나면 그것이 어떻게 다른 의미로 구성되는지, 술 따르기를 둘러싼 두 개의 서로 다른 경험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중적인 시선에서 여성의 경험은 어떻게 소외되는지 등을 좀 더 세밀하게 바라봐야 한다. 또한 ‘술따르기 강요’의 사례에서처럼 성별 이외에 연령이나 직위와 같은 다른 차별적 요소가 함께 교차할 때, 성차별이 얼마나 손쉽게 연장자나 상사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치환되는지 역시 살펴보아야 한다.
다시 과거의 일로 돌아오면 그때 나는 그 일을 성희롱으로 명명하지 않았다. 그때는 성희롱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의 내가 느꼈던 그 복잡했던 감정들을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을 느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성적인 존재로 규정되는 데서 오는 불쾌감인 것도 같고 그 말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굴욕감일 수도 있으며 자유롭게 새로운 문화를 향유하고픈 나의 욕구에 대한 부당한 억압 같기도 하고 어떤 모욕감이나 수치감 같기도 하였다. 아르바이트를 통해 처음으로 돈도 벌고 공식적으로(?) 술 마시는 것이 허용되면서 내심 우쭐해하던, 성인이 되는 길목에서 나는 그렇게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배워야 했다.
나는 이번 대법원 판결 이후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만일 이것을 성희롱으로 제소하였다면? 술을 받으면 답례로 술을 권해야 한다던 행위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상식과 관행에 비추어 선량한 미풍양속이라고 생각한 재판부는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 그런데 나는 이쯤에서 생각을 멈추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성희롱 인정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이 어떻게 기술되고 또한 어떤 언어를 획득하느냐에 있다. 하지만 내가 본 판결문에서 여성의 경험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덧붙임
자주님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