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중앙회는 비정규법의 시행을 1주일 앞둔 6월 19일, 갑자기 고령 공판장의 돼지도축 업무에 대한 도급전환을 공고하였다. 이랜드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비정규법 회피를 위한 외주용역화를 시도한 것이다. 해고될 것인지 도급업체로 옮겨갈 것인지 선택하라는 회유와 협박이 당연한 수순처럼 이어졌다.
도급업체로의 전적 강요를 거부한 비정규노동자들은 6월23일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그러자 농협중앙회는 돼지 도축업무에 아무런 경험도 기술도 없는 인력파견업체와 도급계약을 맺고서 비정규노동자들만을 강제로 보직변경한다. 입사 이후 도축업무를 해왔던 노동자들에게 환경미화, 냉동실보조 같은 단순보조업무를 하게 한 것이다. 경험없는 도급업체가 도축인원조차 확보하지 못해 여전히 정규직 노동자들이 돼지도축업무를 하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7월 24일 19명의 비정규노동자들이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차별시정신청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비정규법이 시행된 이후 처음으로 차별시정제도에 근거한 신청이었기 때문에 고령 축산물 공판장의 사례는 많은 관심을 끌었다. 과연 참여정부의 야심작인 비정규법의 차별시정제도는 비정규직의 차별해소를 가능케 할 것인가?
첫 번째 문제, 차별시정 신청권은 개인에게 한정
차별시정제도가 만들어질 때부터 노동조합을 배제한 채 개인에게만 차별시정 신청권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많은 우려가 있었다. 차별시정제도가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이 차별시정을 신청할 경우 사용자의 회유와 협박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용자는 차별시정 신청이라는 ‘불손한 행위’에 대해 보복하고 차별시정을 회피하기 위해 노동자를 계약해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 우려는 고령 축산물공판장에서 그대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노동자들이 차별시정 신청을 제기하자 농협중앙회는 전방위적인 회유와 협박에 나섰고 결국 19명 중 10명이 7월말 경에 차별시정 신청을 취하하고 도급업체로 전적하였다. 끝까지 차별시정을 요구한 노동자는 계약기간이 끝났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가 해고된 날은 10월 17일. 차별시정 판정문이 도달하기 이틀 전이었다.
두 번째 문제, 차별적 처우 내용의 구체적 명시 책임
차별시정 신청인이 차별적 처우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도록 되어있는 법조항은 두 번째 장벽이 된다. (기간제법 제9조 2항 “기간제근로자 또는 단시간근로자가 … 시정신청을 하는 때에는 차별적 처우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여야 한다”) 그러니까 이 제도를 이용하려는 비정규노동자는 같은 사업장에서 같은 일에 종사하는 정규직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상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고령 축산물공판장의 비정규직들은 절도범으로 몰릴 위험을 무릅쓰고 사무실에 몰래 들어가서 정규직의 급여명세서를 훔쳐봐야 했다. ‘구체적 명시’ 조항은 이렇듯 스릴 넘치는 경험을 제공하는데, 그럴 배짱이 없으면 차별을 계속 감수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세 번째 문제, 차별시정의 조정절차
이렇게 해서 신청이 접수되면 그때부터 노동위원회는 신청 당사자에게 조정을 종용하기 시작한다. 법적 기간인 14일이 지났다고 안심하긴 이르다. 현행법상 차별시정명령을 강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정에 주력하는 것이니 노동위원회를 탓하기도 어렵다.
심문회의에서 노사가 차별여부를 두고 공방을 벌이는 것보다 조정을 거쳐 ‘양보와 타협’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나아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이고 고착화된 차별이다. 그런데 조정안은 단순히 개인에 대한 금전보상과 고충처리 수준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그대로 둔 채 신청인의 불만만 해결해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네 번째 문제, 차별시정명령의 실효성
우여곡절 끝에 차별이 인정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고령의 경우 임금만이 아니라 근로조건과 배치전환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차별이 행해졌음이 지방노동위에서 인정되었다. 그러나 사용자는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계속 불복할 수 있다.
이미 계약만료로 해고된 노동자가, 노동부 해석으로 3개월 치에 불과한 임금차액을 받기 위해 대법원까지 갈 경우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소송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시정명령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 예컨대 부당해고 구제제도에 도입된 이행강제금 제도같은 것을 왜 넣지 않았는지는 묻지 않도록 하자.
이외에도 단체협약을 적용받지 못하는 부분을 합리적 차별로 본 것이며 차별적 처우에 대한 비교대상자 선정의 범위 등 숱한 문제가 있지만 생략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만으로도 고령 축산물공판장 사례는 차별시정제도의 문제점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차별시정을 신청하면 사용자는 회유·협박하고 노동위원회는 조정을 종용하며, 우여곡절 끝에 차별이 인정되면 이미 신청자는 해고된 상태다. 병을 고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 환자는 온갖 고통을 겪은 끝에 죽어야 하는 셈이다. 하기야 이런 방식이면 고치지 못할 병이 없는 건 당연한 일. 노동부, 세계 의학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
지난 10월22일 참여연대에서 <직무·직군분리제>에 대한 토론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도 차별시정제도의 문제점이 지적된 끝에 사회자가 정형우 노동부 비정규직대책팀장에게 물었다. 차별시정 신청권을 노조에도 부여할 의향이 있는가? 정형우 팀장의 답변을 요약하면 이렇다. 현재 비정규직의 노조 조직률은 2%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또 코스콤에서 보듯이 차별해소에 대해 정규직의 반발이 심하다. 그러니 못하겠다는 얘기다.
이 점잖은 발언을 보다 노골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자. 그러니까 비정규직을 제대로 조직하지도 않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하지도 못하는 노동운동에 차별시정 신청권을 선물로 줄만큼 정부와 자본은 어리석지도, 선량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도의 실효성을 보장하는 방안이자 외국의 입법례에도 일반적인 노조의 신청권 부여가 도대체 조직률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물어서는 안된다. 수많은 비정규 노조들이 처절한 장기투쟁 끝에 무너져간 것이 노동부의 외면과 방관 덕분임을 아는지 절대로 물어서는 안된다. 다만 우리는 노동부의 저 파렴치한 충고를 되새겨야 한다. 이런 식으로.
“단결하라, 연대하라, 투쟁하라! 그렇지 않고는 작은 권리 하나조차 결코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덧붙임
◎ 이류한승 님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편집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