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의 밑그림이 채워지기까지
열 살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인권교육이 인권운동의 한 분야로, 인간다운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교육실천으로 자리한 지. 그 사이 다양한 영역에서 인권교육의 씨앗이 뿌려졌고 오밀조밀 작은 결실들이 맺혔다. ‘그들만의 리그!’ 인권교육을 실천하는 현장이나 개인들은 늘어났지만, 인권교육가들이 실천 속에서 부딪쳤던 의문과 고민들을 풀어내고 나눌 곳은 마땅치 않았다. 인권운동 안에서도 인권교육은 변두리 실천에 머물러 있었다. 인권교육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늘어가는 만큼 인권교육이 내놓아야 할 답도 풍성해져야 했지만 궁색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연히 이론적, 철학적 토대에 대한 갈증도 커졌다.
인권교육을 둘러싸고 생기는 질문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 흩어진 교육 경험과 역량을 모아 모두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 그 절박감이 인권교육센터를 만들자는 구상에 날개를 달았다.
인권교육센터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들이 먼저 모여 센터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양한 영역과 현장에서 진행되어 온 인권교육 경험들을 바탕으로 인권교육론을 제대로 엮어봐야 하지 않을까, 인권교육이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사상적 토대부터 튼실하게 닦아야 하지 않을까, 맛보기에 머무르는 교육 내용을 좀더 깊이 있게 끌고 가야 하지 않을까, 이래저래 묵혀놨던 갈증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으론 인권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다양한 현장들을 찾아가 어떤 고민들을 안고 있는지 들어봤다. 다들 교육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재교육 기회를 갈구하고 있었고 교육내용도 더욱 체계적으로 만들 수 있기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이들과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 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치면서 이론과 현장을 씨실과 날실 삼아 인권교육센터 ‘들’의 밑그림이 조금씩 채워졌다.
그런 밑그림을 바탕으로 지난해 12월 12일, 인권교육의 오늘을 진단하고 인권교육센터의 방향성을 점검하기 위한 도움닫기 토론회를 열었다. ‘인권교육운동, 그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는 억압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곁에서 권한강화를 지원해온 인권교육과 공공부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권교육이 맺어온 결실과 도전과제들이 살펴졌다.
담장을 넘으며 인권교육 살찌우기
도움닫기 토론회가 인권교육의 오늘을 살펴본 자리였다면, 창립 기념 토론회는 인권교육이 다른 대안교육과 가로지르기 위한 과제를 탐색하는 자리였다. ‘담장을 넘는 교육실험 - 생태, 인권, 여성, 노동의 만남!’ 토론회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번 토론회의 배경에는 대안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다른 세상을 일구기 위해 노력해온 교육들이 자기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왔다는 반성이 깔려있다. 예를 들어 인권교육은 사람의 권리를 넘어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으로 확대되지 않으면 안 되고, 노동교육은 노동자의 인권에만 머무르지 않고 노동자 내부의 차이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경제정책 등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내용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넓게 공유되지 못하고 있고 실천으로 담장 넘기가 이루어진 경험은 더더욱 적은 형편이다.
그래서 본 토론에서는 대안적 가치에 기반을 둔 교육들이 서로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만나지 못했다면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만나면 좋을지에 초점을 두어 논의가 진행됐다.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의 이수종 님은 “윤리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서로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각자의 소임을 열심히 하되 이런 자리를 통해 공통된 가치를 확인하고 바꿔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 공통된 가치를 잘 녹여낸 교육실천은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다. 서로의 가치를 녹여내기 위해 넘어야 할 인식의 차이나 현실적 장벽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 이날 토론회에서도 확인됐다.
‘노동자교육센터’ 김진순 대표는 인권의 가치들을 그러모은 교육실천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노동권이 곧 인권”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노동자로서의 정체성과 계급의식 속에서 인권을 녹여내려 한다”며 노동자 계급성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또 당면한 현안을 소화해내기도 벅찬 현실적 여건 속에서 교육이 제한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형편을 감안해달라고 했다. 반면 ‘인권교육센터 들’의 박진 활동가는 그런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노동교육이 노동권을 넘어서는 인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른 한편 각 교육실천의 경험을 교류하는 것이 서로를 풍부하게 만드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박진 활동가가 인권 침해를 저질렀거나 저지를 위험이 높은 (잠재적) 가해자 교육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자, 한국여성민우회 먼지 활동가가 성폭력 가해자 교육의 접근 방식을 소개했다. 먼지 활동가는 “성폭력 가해자 교육의 경우 사회적으로 금지된 행동들을 환기시키며 공포를 통해 가해자의 행동을 교정하는 방식과 자기 서사를 통해 다른 사람의 서사를 미루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크게 나뉠 수 있다”면서 어렵지만 후자의 접근 방식이 더 유효하다고 답했다. 이와 같은 성폭력 가해자 교육의 경험은 인권침해 위험이 높은 국가기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날의 자리를 통해 생태(환경)교육, 인권교육, 여성교육, 노동교육이 이름도 주요 실천 영역도 다르지만 담장을 허물고 만나야 할 필요성에는 다들 공감한 듯하다. 그러나 한 번의 토론으로는 교육 내용과 실천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구체적인 상을 그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먼지 활동가는 같이 해야 한다는 관점에는 동의하나 “구체적으로 교안을 섞는 문제에 대한 상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진 활동가 또한 “가치로서도 횡단해야 하지만 실제 사업으로서도 횡단을 체험할 기회가 마련되면 좋겠다. 예를 들어 대운하 문제처럼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주제를 던져 놓고 이걸 생태, 인권, 노동, 여성에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를 함께 얘기해보는 과정이 있으면 좋겠다”며 지속적인 소통의 자리를 제안했다. 이러한 요구는 인권교육센터 ‘들’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현실과 꿈 사이에 가로놓인 가능성
인권교육 농사를 짓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꿈도, 인권교육에 대한 바깥의 기대도 크다. 반면 인권교육 들판은 여전히 메마르고 허허롭다. 현실과 꿈 사이 어딘가에 인권교육의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다. 새로운 도전과제와 가능성을 품고 출발하는 인권교육센터 ‘들’은 어떤 생명들을 가꾸어갈까. 함께 힘을 모아주는 센스를 발휘하며, 그 기대를 실현하는 ‘들’ 사람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임
이묘랑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의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