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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을 ‘짝퉁 정규직’으로 만들면 차별이 사라지나

[삶_세상 2] 은행 무기계약직 노동자 양미현 씨를 만나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면서 정규직이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계약연장을 안하는 것 빼고는 비정규직과 똑같아요.”

양미현(가명) 씨는 은행에서만 10년 동안 일했다. 파트타임으로 시작한 후 비정규직을 거쳐 최근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었다. ‘계약직’이긴 하지만 정년 전 자신이 원할 때까지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용이 안정됐다고 해서 정규직과 같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정규직과의 급여 차이가 눈에 띄게 컸다.

“정규직과 중규직은 경력이 비슷한 상황에서 임금 차이가 두세 배 정도 나요. 처음 입사하면 정규직 임금이 중규직보다 1.5배 정도 더 많아요. 가령, 내 연봉이 3천만 원이라면 나와 경력이 비슷한 정규직의 경우 7천만 원 정도 받는다고 보면 되요. 게다가 정규직은 앞으로도 승진이나 호봉에 따라서 급여가 계속 올라가는데 중규직은 일정 수준 이상 승진이 안 되니 급여 차이가 갈수록 더 커지죠.”

비슷한 업무, 확연히 차이나는 급여

겉보기에는 정규직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무늬만 정규직’을 흔히들 ‘짝퉁 정규직’이라고 말한다. 분리직군, 무기계약직, 하위직 등으로 나뉘는 이런 고용형태는 고용이 보장되지만 임금이나 근로조건 등이 비정규직과 다름없다는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중규직’이라 하기도 하는데 기업과 정부는 이것이 ‘정규직’이라고 강변하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과연 중규직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일까.

중규직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2006년 우리은행 분리직군제 도입은 많은 쟁점을 던졌다.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중규직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2006년 우리은행 분리직군제 도입은 많은 쟁점을 던졌다.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기본급뿐만 아니라 상여금에 있어서도 정규직과 중규직의 차이는 컸다.

“연말에 실적이 좋으면 특별 상여금이 나와요. 정규직은 입사한 지 2~3년 되면 상여금을 1천만 원 넘게 받는데 중규직은 아무리 오래 돼도 정규직의 반 정도 수준으로 받아요. 회사는 ‘중규직도 받는다’는 것만 부각시키고 그 차이는 말하지 않죠. 중규직들 사이에서는 이런 것에 대한 박탈감과 위화감이 커요.”

급여의 차이에 비해 업무의 차이는 크지 않다.

“정규직은 주로 신규, 해지, 대출, 외환 등의 업무를 보고 중규직은 입출금, 재심 등과 같은 온라인창구 업무를 봐요. 업무가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거의 같은 성질의 업무예요. 실적에 있어서도 정규직과 중규직이 거의 차이가 안 나거든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한데, 어떤 부분에서는 중규직들이 오히려 실적이 좋아요.”

계약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할 때 은행 측은 ‘인사고과가 불량할 경우 언제든 계약을 중단할 수 있다’는 문구를 계약서에 넣으려고 했다. 말은 ‘무기계약’이라고 해놓고 실질적으로는 일반 계약직과 전혀 다르지 않은 조건을 요구한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노조가 반발하면서 실제 무기계약직 전환에서는 그 내용이 빠졌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며 생색내는 은행이 중규직으로의 전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차별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구분이 다시 차별을 불러

“은행에서 상담업무나 예금상담을 할 때, 손님들이 누가 중규직이고 정규직인지 알아요. 정규직과 중규직이 일하는 창구가 분리되어 있거든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기 전까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창구에서 같은 일을 했어요. 그런데 창구가 분리되어 있으니까 내가 이야기하는 것과 정규직이 이야기하는 걸 손님들이 받아들이는 게 달라져요.”

업무에 따른 창구 배치는 결과적으로 정규직과 중규직의 구분을 가시화했고 이렇다 보니 직원들 사이에서도 위계와 차별이 생긴다.

“첫째 주와 둘째 주 화요일은 가정의 날이라고 해서 직원들 모두 여섯 시 반에 퇴근해요. 평소에는 정규직이 일곱 시 반, 중규직이 여섯 시 반 정도에 퇴근하거든요. 하루는, 가정의 날이라 여섯 시 반에 퇴근하는 정규직 직원이 중규직 직원들에게 ‘너희는 매일 가정의 날인데 오늘도 일찍 가냐’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기분 나빴어요.”

차별은 거창하게 눈에 띄는 ‘사건’으로 드러나기보다 교묘하고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 불쾌한 감정에 ‘차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 비정규직 차별이라는 비난을 피하려고 은행이 중규직 노동자들을 아예 분리·구분하다 보니 중규직 노동자들이 당하는 일상적인 차별은 눈 앞에서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드러난 현상에 따라 새로운 차별이 생긴다.

“나이 어린 중규직 사원들에게는 상품을 다 팔지 못하면 퇴근할 생각하지 마라, 섭외전화를 돌려라 등 협박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해요. 그런데 그런 잔소리를 정규직들에겐 하지 않고, 꼭 중규직들을 향해서 이야기해요. 점심시간에 손님이 많이 오는 편인데, 중규직들에게만 손님들 다 받은 다음 밥을 먹으라고 한 경우도 있었어요.”

‘차별’의 의미는 더욱 풍부해지면서도 날카로워져야 한다.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차별’의 의미는 더욱 풍부해지면서도 날카로워져야 한다.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비전이 없는 게 가장 힘들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후 복지 부분에서는 정규직과 거의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복지라고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었”던 계약직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후에는 육아 휴직과 자기계발비, 자녀학자금이나 학원지원금 등 이전에 받을 수 없었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고용이 조금 안정되고 눈에 띄게 복지 부분이 개선되었다지만 미현 씨는 여전히 힘들다.

“비전이 없는 게 가장 힘들고 피곤해요. 무기계약직도 정년까지 보장되긴 하지만 승진에 한계가 있죠. 어느 정도 올라가면 더 이상 변화할 기회가 없어요. 동일한 업무를 퇴직할 때까지 계속 해야 하는 거죠. 정규직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승진해서 일이 바뀌거나 아니면 다른 업무로 빠지는 경우라도 있는데 무기계약직은 그런 게 없어요. 구조적으로 정년을 채울 수 없는 분위기가 되죠. 그런 상황에서 누가 일과 삶에 비전을 가질 수 있겠어요? 발전할 기회가 없으니까 ‘이거 해서 뭐하나’ 하는 회의감만 들고…….”

“정규직은 1년에 800명 정도 뽑는 것 같고, 중규직은 한 기수에 200~300명 정도 뽑는데 이렇게 수시로 뽑아요. 그런데도 회사에서는 항상 부족하다고 해요. 중규직 업무가 힘든 데 비해 비전도 없고 차별도 심하니까 사람들이 금방 그만두는 거죠. 같이 입사한 후 몇 년 지나면 중규직은 그 자리에 계속 있는데 정규직은 저기 멀리 가있고, 그런 거 보면 안타까워요. 신입 중에서도 중규직이 대부분이라는 말인데, 특히 신입 중규직은 대부분 여성이에요. 정규직은 5대 5나 6대 4 정도로 여성이 좀 적은 편인데, 여성은 주로 지점으로 많이 빠지고 남성은 본점 근무를 많이 해요. 본점 업무는 지점 관리 등과 같은 주로 사무 관리직이고 지점 업무는 주로 사람 대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힘들죠. 본점 업무가 더 편한데 승진도 빠르고 혜택도 더 많아요.”

신입 사원의 다수는 무기계약직으로 뽑고 무기계약직의 절대 다수는 여성이다. 정규직이더라도 성별에 따른 차별은 뚜렷이 존재한다. 성별에 따른 차별과 노동의 불안정화가 맞물려 여성이 빈곤으로 내몰리고 빈곤은 구조적으로 여성화되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차별은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나쁘기도 하지만, 사회 경제적인 구조와 결합해 구조적인 빈곤을 만들어내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또다른 인권침해를 양산하기도 한다.

고용주들이 ‘정규직’이라고 주장했던 중규직은 결국 비정규직의 다른 이름임이 밝혀졌다. 고용 형태만을 안정화함으로써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자본의 시도는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종언을 고했다. 비정규직 문제는 고용계약기간의 연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여러 문제들을 포괄하며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특징으로 하는 비정규직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특히 ‘차별’을 통해 어떻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침해되고 있는지, 그러한 침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노동자를 분할하는 신자유주의적 노동 관리 구조가 어떻게 차별을 통해 확대되고 구조화되는지 사회구조의 문제와 동시에 인간의 문제로서 더욱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덧붙임

박석진 님, 이재영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