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인권이야기

[하승우의 인권이야기] 가족,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의 교차로?

작년에 한 모임에서 풀뿌리운동과 관련해 고민하는 점을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가족이나 아이가 없어 풀뿌리운동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했다. 나만 그런 얘기를 했으면 좀 뻘쭘했을 터인데, 다행히(?) 다른 활동가도 나랑 비슷한 얘기를 했다(물론 그 속뜻은 다를지 모르겠다!). 물론 가족이나 아이가 없어도 지역에서 활동을 할 수 있지만, 아이와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지역운동의 특성상 어떤 벽을 느끼곤 한다.
작년부터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면서 결혼과 가족에 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애인의 반응은 아주 부정적이었다. 나 역시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던지라 그런 반응은 낯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 머리 속에는 앞선 모임에서 나눈 얘기들이 고여 있었다. 한쪽에선 결혼과 가족이 활동의 굴레라면, 다른 쪽에선 그것이 활동의 중요한 동기이다. 단지 관점의 문제일까?
이런 차이는 며칠 남겨두지 않은 우리의 결혼에서도 드러났다(살다보면 때론 뜻하지 않게 일이 흘러가기도 한다!). 풀뿌리운동을 하는 분들이 따뜻한(?)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면, 인권운동 쪽의 반응은 약간 썰렁(?)했다. 아마도 그 썰렁함의 원인은 가족이라는 낡은 틀에 갇힐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단지 결혼만이 아니라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이 주목하는 주체와 운동 전략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권운동이 소수자의 차별이라는 특수성에 주목하며 그것을 보편화시키려 한다면, 풀뿌리운동은 주민이나 시민이라는 다소 보편적인 주체에 주목하면서 그들이 서로 이해하고 보살피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도우려 한다. 인권운동이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안을 붙잡고 치열하게 부대낀다면, 풀뿌리운동은 다소 느슨하게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주제를 통해 사람들의 시야를 넓히고 역량을 기르려 한다. 그래서 인권운동과 풀뿌리운동은 사뭇 다르게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권운동이나 풀뿌리운동 모두 현실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이 주체로 거듭나는 것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역량강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실 같은 목표를 향하는 듯하다. 두 운동 모두 어떤 영웅이 상황을 해결해 주리라 기대하지 않고 그 당사자들이 스스로 상황을 변화시키도록 도우려 한다.
더구나 한국처럼 기득권층이 강력한 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력의 순환 고리에 갇혀있다. 파농이 말했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사람들처럼, 우리는 하나의 가면을 쓰고 서로를 미워하며 대립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기득권층이 강요하는 가면의 모습에 자신을 맞추려 한다. 이런 사회에서 풀뿌리운동이나 인권운동은 그런 가면을 벗고 나다운 모습으로 살고 나와 같은 약자들과 연대하려 한다는 점에서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학교폭력에 대한 가족적인 관심이 청소년 인권과 평화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으로 확장되는 곳에서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의 방향은 같은 목표를 향한다. 비록 운동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 곳은 다르지만 그 운동이 향하는 방향은 서로 다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새로운 시작일 뿐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 것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반드시 결혼을 해야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남들과 다른 형태로 시작할 수도 있고, 남들과 비슷하게 시작할 수도 있다. 다르게 시작한다고 해서 그 끝이 다르다고 보장할 수 없고, 비슷하게 시작한다고 해서 그 끝이 같다고 얘기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과한다고 해서 그 관계가 자동적으로 가족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제도 이상을, 즉 서로 보살피고 돌보며 함께 살고 함께 즐기는 관계를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족은 지속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고, 때로는 치열한 갈등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낳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에 가족의 경계 역시 고정될 필요가 없다. 옛날 묵자는 천하에 남이란 없다고 했다. 같이 밥을 나눠 먹고 서로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의 식구이자 가족이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묵을 곳과 먹을 것을 나누고 까치밥과 고수레를 나누는 환대와 반김의 전통은 그 경계의 유연성을 잘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가족은 새로운 시작일 뿐 관계의 끝이 아니다.
우리에게 결혼은 일종의 방편(方便)인 듯하다. 방편이란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서 편하고 쉽게 이용하는 수단을 뜻한다. 강을 건너고 난 뒤에도 나룻배를 머리에 지고 가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룻배는 방편일 뿐이다. 어쨌거나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과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며 살고 있으니 그 속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가족은 또 다른 도전이자 시작이다. 교차로에서의 새로운 만남이 가능성을 주리라 나는 믿는다.

뱀다리: 아, 인권활동가들의 축하를 유도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물론 축하를 해준다면 아주 고맙겠지만.^^

덧붙임

* 하승우 님은 지행네트워크의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