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 번역문을 올해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2008년 12월,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맞아서 2008 인권선언 운동을 준비할 때, 세계인권선언 내용을 봐야 할 일이 있어 찾아보다가 국가인권위원회 사이트에서 한 번 흘끗 봤다. 하지만 당시에는 찾으려고 하던 조항을 찾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어서 미처 문제점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다른 계기로 자세히 읽다가 깜짝 놀랐던 것이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하면, 국가인권위원회가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맞아 세계인권선언 읽기 운동을 하면서 공식 게재했던 세계인권선언 한글 번역문, 그 중에서도 전문(前文)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그 번역문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청소년인권수첩』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독일의 크리스티네 슐츠 라이츠의 인권교육용 책을 번역한 것인데, 나도 몇몇 절을 한국 상황에 맞게 새로 다듬는 일을 했고 또 몇 개의 장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과 청소년인권 문제에 관한 저술을 청소년인권활동가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어쩌다보니 공저자가 되었다.
그런데 2010년 12월경에 출간된 『청소년인권수첩』을 받아서 찬찬히 읽다보니, 책 제일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세계인권선언”이 눈에 딱 걸렸다. 전문의 내용이 아무리 봐도 영 내 기억이랑은 딴판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는데, 다음에는 ‘아니 이거, 출판사는 대체 어디서 이런 번역본을 구해서 실은 거야? 역자가 이렇게 번역한 건가?’라고 생각하고 출판사에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책에 실린 세계인권선언 끝에는 떡 하니 출처라고 이런 글자가 쓰여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 세계인권선언 국어 번역문”. 아니 이런. 이게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식 번역문이라니. 다시 한 번 찾아보니까 2008년에 세계인권선언 60만 읽기 운동을 한다면서 국가인권위원회가 공식 발표한 바로 그 번역문, 나도 한 번 흘끗 봤던 그 번역문이 이 번역문이었던 것이다.
저항권, 법치주의 등의 내용 누락
자, 이쯤 되면 대체 어떤 부분이 그렇게 문제라는 건지 궁금하실 것이다. 전문이 그렇게까지 긴 것은 아니니까 여기에 첨부하도록 하겠다.
인류 가족 모두의 존엄성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다. 인권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만행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했던가를 기억해 보라. 인류의 양심을 분노케 했던 야만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늘날 보통 사람들이 바라는 지고지순의 염원은 ‘이제 제발 모든 인간이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리라.
유엔헌장은 이미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과 가치,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했고, 보다 폭넓은 자유 속에서 사회 진보를 촉진하고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도대체 인권이 무엇이고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는가?
유엔총회는 이제 모든 개인과 조직이 이 선언을 항상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서, 지속적인 국내적 국제적 조치를 통해 회원국 국민들의 보편적 자유와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하도록, 모든 인류가 ‘다함께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공통 기준’으로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이렇게만 보면 뭐가 누락된 건지 잘 모르실 테니, 비교할 만한 다른 번역문을 첨부하도록 하겠다. 아래는 인권운동사랑방에서 게재한 세계인권선언 번역문이다.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가 됨을 인정하며,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결과하였으며, 인류가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세계의 도래가 일반인의 지고한 열망으로 천명되었으며,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며,
국가간의 친선관계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 긴요하며,
국제연합의 여러 국민들은 그 헌장에서 기본적 인권과, 인간의 존엄과 가치,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였으며, 더욱 폭넓은 자유 속에서 사회적 진보와 생활수준의 개선을 촉진할 것을 다짐하였으며,
회원국들은 국제연합과 협력하여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보편적 존중과 준수의 증진을 달성할 것을 서약하였으며,
이들 권리와 자유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이러한 서약의 이행을 위하여 가장 중요하므로,
따라서 이제 국제연합 총회는 모든 개인과 사회의 각 기관은 세계인권선언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한 채, 교육과 학업을 통하여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점진적인 국내적 및 국제적 조치를 통하여 회원국 국민 및 회원국 관할 하의 영토의 국민들 양자 모두에게 권리와 자유의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인정과 준수를 보장하기 위하여 힘쓰도록, 모든 국민들과 국가에 대한 공통의 기준으로서 본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단순히 표현상의 차이뿐 아니라 내용이 다른 부분이 제법 있다. 특히나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라는 내용이 통째로 누락된 것을 알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원래의 뜻에 부합하는 쪽인지는 명백하다. 왜냐하면 영어본에도 “Whereas it is essential, if man is not to be compelled to have recourse, as a last resort, to rebellion against tyranny and oppression, that human rights should be protected by the rule of law”라고 해서 그 내용에 해당하는 문장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 왜 번역을 이렇게 불완전하게 생략하고 누락시켜가며 한 것일까? 단순히 번역 솜씨나 의역과 직역 사이의 차이일까? 확실히 한국어 문장 자체로만 볼 때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번역문의 더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것 같긴 하다. 국가인권위원회 또한 이 번역문에 관해서 ‘낭독용’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의역이든 낭독용 편집이든, 그 본래의 내용을 잘 살리는 범위 안에서만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통째로 누락된 문단은 그렇게 가볍게 생략해도 될 내용이 아니다. 그 부분은 때때로 “인권이 짓밟힐 경우에는 사람들은 폭정과 압제에 맞서 저항을 할 수 있다.”라고, 세계인권선언의 조항으로는 포함되지 않은 저항권의 뜻을 담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해석되곤 하는 문구이다. 또한 인권이 법의 지배―법치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는 내용 역시 인권과 법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중요한 문장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세계인권선언 전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생략하는 괴상한 오역을 한 것이다.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된 실수인가 고의적인 음모인가
이 ‘묘한 번역’ 또는 ‘묘한 생략’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고질적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원래 인권 분야의 글을 번역할 때는 어휘의 선택이나 개념의 사용 등에서 어느 정도의 전문성이나 경험이 필요하다. 예컨대 "personal liberty"를 “신체의 자유”가 아니라 “개인적 자유”라고 번역한다거나, "punitive damages"를 “징벌적 손해배상”이 아니라 “가혹한 손해액” 같은 식으로 번역한다면 내용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는 지금까지 번역 작업에서 그 분야에 관련된 인권단체나 인권활동가들에게 감수를 부탁하고 함께 작업을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이 세계인권선언문 오역 역시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단체들과 소통과 협력을 잘 하지 못하면서 생겨난 실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낭독용으로 길이를 줄이고 편집을 하다 보니, 실무자 또는 번역자가 그 구절의 중요성을 미처 모르고 생략해버렸는데, 인권단체 등에 의견을 구하거나 협력을 구하지 않고 추진하다보니 그 구절을 누락시킨 게 얼마나 중대한 오역이었는지를 몰랐다는 가설이다.
두 번째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좀 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전문 중에서도 인권의 저항적 내용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고 있고, 또 인권이 법의 상위 가치임을 보여주는 이 구절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게 싫었기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이를 의도적으로 뺐을 수도 있다. 일종의 음모론처럼 들릴 법한 해석을 하자면, 국가인권위원회는 저항적인 인권을 국가가 포섭하기 위한 국가 기구이고 세계인권선언을 이렇게 번역한 것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그런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뭐, 사실 굳이 그렇게 적극적인 검열이 아니라 해도, “이 구절은 앞으로 내세우기에 좀 그런데”, “이건 인권의 샤방샤방한 느낌과는 좀 안 맞는데” 정도의 껄끄러움만으로도 그 구절을 쉽게 삭제할 수 있었을 법하다.
현병철은 문제지만 문제는 현병철이 아니다
『청소년인권수첩』에 실을 세계인권선언 한국어 번역문을 찾던 출판사로서는 사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공인된,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오히려 문제가 많은 선택이었을 줄이야. 나는 이미 1쇄가 간행되고 있는 『청소년인권수첩』에 국가인권위원회의 번역문이 버젓이 실려 있고 그걸 수천 명의 사람들이 보게 될 거라는 사실에 아찔해지곤 한다. 더군다나 내가 공저자로 있는 책이라서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이 번역문을 가지고 60만 읽기 운동을 했다는 걸 생각해보고 한층 더 아찔해진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국가 공식 인권기구의 ‘뻘짓’ 하나가 이렇게 큰 폐해를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쓴 다음에 국가인권위원회에 전화를 하든 공문을 보내든 해서 정정을 요구하고 『청소년인권수첩』에 실린 번역문 역시 바꾸도록 할 생각이다.
이 세계인권선언 60만 읽기 운동은, 현병철이 아니라 안경환 위원장 시절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번역 역시 안경환 위원장 때 이루어졌다. 물론 무자격에 인권감수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병철이 위원장으로 있는 지금, 이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현병철 체제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의 문제는 단순히 현병철 또는 이명박 정권의 문제만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번 세계인권선언문 번역의 문제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 아닐까? 그것이 협력 부족에서 비롯된 실수이든, 고의적인 누락이든. 단순히 “현병철 어떻게 퇴진시킬 또는 정신 차리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가?” 등의 좀 더 적극적인 질문과 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덧붙임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